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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이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다.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2. 1. 19. 16:10
세월이 흘러가고 나 자신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삼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소통의 문제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지난 25여 년 간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Global Company)에서 일했던 시간과 경험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매 순간 대화와 소통이 무척이나 중요했었다. 그 당시 미국 본사와 각 나라의 지사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나에겐 외국어인 영어를 사용해야 했다. 나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에서 오는 간극이라고 여겨서 여러 가지 가능한 모든 방법을 이용하여 이해를 돕고 보완할 필요도 느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한 살씩 먹으면서 비단 다른 언어에서 오는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나라 안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충분한 이해 없이 불신과 오해가 쌓여가는 일들이 흔하게 발견되었다. 개인의 이해력과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불충분해 보였다. 물론 인간은 각기 처한 상황, 문화과 환경이 다르고 성장 과정과 교육 수준도 다름에서 오는 차이도 있다. 그 누가 틀렸다고 할 수만은 없고 차이에 의한 다름으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도 당연히 있었다.
사실 나 스스로도 우리나라의 언어, 한국어가 점점 어렵고 민감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언어는 그 시대와 사회상에 따라서 계속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등 기능적인 부분의 능력도 나이와 함께 역으로 감소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묶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을 상대로 하는 언론과 여러 공인들은 보통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편,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SNS(Social Network Service)와 같은 IT 기술의 발달과 지원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발달해왔다. 기존의 TV 뉴스나 신문 같은 전통적인 방식의 언론매체를 제외하고도 세계 곳곳에서 실시간 일어나는 일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 것이다. 어느 정도 기준이 있고 보편화되어 있었던 소통의 정도와 수준에도 어느덧 파격적인 차이가 생겨났다. 표현을 하는 사람도 받아들이는 사람도 이해의 정도와 차이가 커졌다. 그만큼 오해의 소지도 많아져 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마치 언어의 유희를 즐기듯 줄임말을 만들어내고 함축적 언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실제로 몰라서 생기는 해프닝(Happening)도 있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을 대변하기 위하여 알고도 모른척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여론을 몰아가기도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좀 더 과하게는 가짜 뉴스는 어쩌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중은 변화에 기민하게 적응하고 수준 또한 높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네 라는 사실과 함께 그렇게 벌어진 일에 대하여 함축적인 의미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옛 말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 저마다의 이해와 해석은 대부분 사실의 진위를 뛰어넘어 이해 관계자에 따라 다르게 분석되곤 해왔다. 어느덧 이런 현상이 일상생활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소통이라는 것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원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소통을 하려는 의도와 노력도 희미해져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이제 다가오는 3월 초에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리더, 대통령 직접 선거를 앞두고 있는 것이다. 이미 확정된 후보들에 관한 보도들로 매일 정보의 홍수가 이어지고 있다. 누가 어디서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누가 어디서 어떤 말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벌떼가 들러붙듯이 난리가 났다. 당사자 본인이 말의 의미와 의도를 다시 이야기하더라도 또 다른 분석이 나오곤 했다. 이미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소위 말하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의 예가 되어 버렸다. 저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통역해 버리는 것이었다. 말한 사람이 아무리 억울해도 소용없었다. 혹은 애매모호한 의미 전달로 더욱 관심을 집중시키거나 자신이 진짜 하고픈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려고 함축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제는 그 누구의 말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어느덧 우리는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 상대방의 인격과 습관 등을 토대로 이해의 정도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일 매 순간 시험을 치르는 셈이었다.
나에겐 외국어인 영어를 많이 사용해야만 했던 직장 생활이 다시 떠올랐다. 언제나 영어는 숙제와 같은 존재였다. 언젠가 인터뷰를 통하여 세계적인 통역사 교육을 받았고 국가 정상 간의 통역을 담당했던 분이 나왔다. 아직도 매일 반복하여 공부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방법밖에 없다는 그분의 일상생활을 소개했었다. 왠지 위로받게 되었다. 나의 직장 생활중 미국 본사에서 발표와 교육(Presentation skill training)을 담당하던 직원이 항상 중요시하는 것이 있었다. 소통에서 필요한 것은 멋진 단어, 남들이 흔히 사용하지 않는 희귀한 단어, 쓸데없는 함축적 의미들로 자신의 수준을 과시하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할 소요라고 했다. 사실 그런 단어를 찾아내고 이용하는 것은 소통할 마음의 자세가 없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누가 들어도 간단한 단어와 명쾌한 의미로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 전달의 역할에 효과적이고 충실할 수 있는 소통 능력자가 최고라고 했다. 결국 맞는 말이었다.
과연 이렇게 우리는 모든 것을 해석하고 통역해야 하는 세상에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너무 피곤한 세상이다.
최고의 소통 능력자가 나타나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노력해야 할 일이다.
* Note : 수많은 사람들이 연애를 시작하고 좋은 감정, 더 나아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행복감과 함께 또 다른 정신노동이 시작되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표현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이 집중되고 그 해석에 따라 일희일비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경우에 따라 자신의 오해일 수도 있고 과민 반응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기보다는 감성만 충만해져서 사실 그대로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것 또한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일이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고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할 경우가 살면서 생각보다 자주 생긴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우리 이웃, 우리나라, 우리의 미래 세대를 위한 일에는 감정과 일방적인 자신의 생각보다는 객관적이고 올바른 방향, 대의를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항상 통역이 필요한 표현이라면 대중에게 적절하지 않다. 겉 멋만 번지르르한 표현도 소용없다. 단지 누가 언제 들어도 명확하고 진실되어야 한다. 소통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결국 진심만이 제대로 전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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