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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중남미에서 입장 차이를 확인하다.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0. 11. 4. 20:57
2000년 중반에 후배와 함께 중남미 3개국인 온두라스(Honduras), 과테말라(Guatemala)와 니카라과(Nicaragua)로 처음 출장을 다녀온 후, 몇 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몸 담아 일해온 글로벌 기업(Global Company)과 여러 한국 업체들의 비즈니스 상황도 변해갔다.
다른 지역으로 생산 기반이 새로이 추진 또는 이동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까지는 여전히 중남미 지역은 중요한 생산지 중에 하나로 남아 있었다. 해외에 생산 시설을 갖춘 업체들은 항상 시설 투자가 이뤄진 국가들의 모든 전반적인 상황을 민감하게 관찰했다. 그들의 목표와 계획대로 안정적인 생산이 이뤄지려면 기본적인 인프라(Infrastructure) 기반은 물론 각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와 종교 문화적인 상황과 더불어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인 자연적인 현상까지도 면밀히 검토되어야 했다. 간혹 그 중남미 국가들의 국가 원수나 최고 책임자들이 우리나라 한국을 방문할 시, 우리 한국 업체 대표들과의 만남이 성사되기도 했다.
처음 다녀온 중남미 지역 출장 이후, 또 그 먼 지역을 갈 기회가 있을까 생각할 무렵 다시 그럴 기회가 왔다. 미국 본사 출장 업무를 마친 후, 미국에서 바로 중남미 지역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그 2번째 방문은 나 혼자 가게 되었다.
온두라스는 생산 시설이 조금 남아 있기는 했던 시기였지만 특별히 변동된 사안은 없어서 2번째 방문에서는 온두라스는 가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치안이 심각한 온두라스에 혼자 가기에는 매우 위험부담이 컸고, 비즈니스가 점차 줄고 있기도 했다. 첫 번째 방문에서 나를 긴장, 당황시켰던 모든 일들이 마치 영화 장면 같은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비즈니스를 하기엔 치안 상황이 불안하고 제반 여건이 취약해지면서 온두라스와의 비즈니스는 사실상 마감이 되었다. 지금도 당차고 똘똘하게 일 잘했던 우리 회사 온두라스 지사 직원의 안부가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워낙 똑 부러지게 일 처리를 잘했으니 어디에서도 잘 지내고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혼자 과테말라에 먼저 도착했다. 첫 번째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철저히 준비해서 갔다. 그 지역을 방문할 때는 항상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사전 예약 확인을 여러 번 하고 비상시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모든 분들의 연락처와 방법을 확보했다. 물론 현지 지사 직원들과 현지 업체들도 모두 나의 행동 동선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소지한 모바일 폰이 그 지역에서도 원활히 작동하여 비용이 들기는 하겠지만 비상시 이용이 가능했다.
이제는 첫 대면이 아니고, 업무상 이메일과 콘퍼런스 콜 화상회의(Conference call meeting) 등으로 익숙해진 지사 직원들과 재회하여 일정을 시작하였다. 주로 첫 번째 방문 이후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한 부분이었고, 새롭게 확충된 업체나 생산 시설의 방문으로 계획되었다. 각 업체별로 현재의 상황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점검이기도 했다.
업무 첫 하루 일정을 마치고 과테말라 지사의 친한 직원과 함께 저녁 식사를 위한 장소로 이동을 할 때였다. 차에서 내려 아주 잠깐 걸어야 하는 그 짧은 시간에 시내 한 복판에서 현지인들끼리 길거리 패싸움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워낙 위험하고 갱단들이 많다는 과테말라였으니 각별히 조심했지만 바로 길거리 앞에서 갑자기 위협적인 흉기를 소지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에 맞선 상대방은 각목을 휘두르려 했다. 지사 직원은 급히 나를 감싸고 건물 실내로 피해 들어갔다. 밖에선 누군가 피를 흘리고 있었고 이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상황이 정리되어 갔다. 불법으로 총기 소지도 많이 하고 있다는 나라이니 언제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였다. 다행히 금방 상황이 마무리되어 예정된 곳에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지만, 항상 안전에 주의해야 하는 나라였고 그것은 몇 년 간의 세월이 지났어도 나아진 것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갈대와 같다. 서울 사무실에서 해당 업체와 업무를 볼 때는 당장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생산지의 업무 상황과 성과가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져서 마음에 불만이 쌓이게 되곤 했다. 한국 업체들이 여러 번 알려 주었다는 지시 사안대로 고쳐지지 않는 것, 무엇 하나 변경하려면 정확히 전달되지 않거나 변경이 제대로 안 되어 사고로 이어지거나 늦어지는 이유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현장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화가 나기도 했다. 그것은 서울에서 근무하는 업체 담당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이메일과 전화 그리고 그 당시 시작된 화상 회의를 통해 여러 번 당부하여도 현장에서는 바로 반영되지 않아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나의 출장 일정과 맞추어 도착한 업체 담당자들도 나도 막상 생산 현장에 도착하면 마음이 약해진다.
단단히 벼르고 왔던 마음도 그 머나먼 나라까지 와서 고생하시는 분들의 얼굴을 막상 대하면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안부 인사와 함께 고생 많으시다는 시작 말부터 하게 된다. 첫 번째 출장에서는 그저 그 땅에 가서 터전을 일구고 하나부터 시작하여 그만큼 이룬 것에 대해 연신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졌었다. 하지만 두 번째에는 감사할 것은 충분히 감사하고, 객관적인 성과와 노고를 높이 살 만한 것은 하되, 그동안의 결과들로 개선해야 할 것, 잘못된 관행들 또한 확실히 알려주고 바로 잡아야 했다. 그것이 결국은 그 멀리까지 가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좋게 좋게 시작한 개선과 요구 사안들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앞에서 그 순간만을 모면하기 위해서 알았다고 가벼이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산업계이든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불행히도 그간의 관행만을 답습하게 되고 고집도 세지는 것 같고 융통성은 사라지는 경우가 생긴다. 오랜 세월 타지에서 그 업무만 했던 사람들에게 변화와 개선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렵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은 어긋나기 쉽다. 마치 귀로는 듣고 있지만 눈빛과 마음으로는 '어디 그것이 그렇게 쉬운지 아냐', '직접 와서 한 번 해보지', '가끔 한 번 와보고 대체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쉽게 말하냐' 하는 식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근거와 가시적인 결과 앞에서 사람들은 약간 주눅이 들곤 한다.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 다른 업체, 다른 생산지 등 수치와 시기별 결과물과 함께 설명을 하고, 이 모든 것이 현재보다 앞으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미래를 위해 각성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들임을 부각해야 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사실을 객관적인 자료로 알려 주어야 한다. 확실한 것은 결과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 차이와 마음가짐, 자세가 미래의 성패를 가름하곤 했다.
니카라과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그나마 과테말라는 약간의 긴장감과 속도감이라도 있었지만, 좀 더 여유로운 근성을 가진 니카라과는 몇 년 전의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개선이 잘 안되고 똑같은 실수를 하는 것은 오히려 후퇴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문제라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가짐에 있었다. 한국 업체들의 투자 시설이 좀 더 추가되었다는 것 외에는 현장의 분위기는 예나 그때나 비슷했다. 양과 질에서 어느 쪽도 진전은 없어 보였다.
'우물 안 개구리', '고인 물은 썩는다' 같은 문구들이 생각나곤 했다. 실질적으로 거리가 머나먼 중남미 지역의 나라들에서 그들만의 세상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더욱더 관행과 답습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것 같았다. 안타까움과 함께 그런 상태를 바라보는 것이 나에겐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었다.
물론 그것은 과테말라와 니카라과, 중남미 지역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모든 생산지가 있는 여러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으나 그 개선 속도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예전처럼 비용을 내어 전화나 팩스를 이용하던 시기를 지나 이메일을 주고받고 더 나은 기술의 발달로 실시간 화상 회의를 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거리가 있는 현장과의 간극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직접 가서 관계 형성을 하고 얼굴을 맞대고 대화와 토론을 하고 실제로 위기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생산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까지 그 당시 IT 기술의 발달이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문제는 경우에 따라 본인만 모르고 타인은 보고 금방 알듯이, 생산 현장의 문제를 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위기의식을 갖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었다.
직접 업체 사람이 아닌 나로서는 그저 결과를 놓고 비평을 할 수밖에 없으니 좋은 소리도 아닌 마당에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상황, 그저 그 회의를 빨리 마감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남이 아닌 자신들이 스스로 깨닫고 진심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변화와 발전은 없었다.
직항 없이 항상 미국을 통한 경유로 길고 긴 이동 시간을 들여 다시 찾은 중남미에서 비즈니스 업무적으로는 서로의 입장 차이만 느끼고 돌아왔다는 것에 아쉬움 가득한 두 번째 출장이었다. 뭔가 다른 방도가 있어야 함을 깨닫는 시기였다.
* Note : 며칠 전에 우리나라 모든 국민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 기반을 다져주신 세계 일류 기업의 회장님이 타계하신 소식을 접했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놀라고 슬픈 마음과 동시에 그분의 지난 과업이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분이 남기신 그간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 일화들 중에 독일 생산 현지를 둘러보시고 그 당시 기업의 모든 상황과 맞물려, 모든 임원과 관계자들 앞에서 아내와 자식들 제외하고 모두 바꾸라고 지시하셨다는 글을 읽었다. 오죽하면 그런 말을 하셨을까 싶으면서도 백번 넘게 옳으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기업을 책임지는 최고 경영자의 지위에서 직접 진두지휘하셨으니 가능했다. 순간의 자만감, 편안함과 안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인지하시고 항상 위기를 내다보고 위기관리에 힘쓰셨으니 발전이 있고 자만심이 자부심으로 바뀔 결과를 일궈내셨다.
나의 회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회사가 먼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니, 그것에 자극받은 경쟁사들은 더 노력할 것이고 그래서 전반적으로 우리나라가 더불어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선봉자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남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은 덕목 중에 덕목이다. 하지만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도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하는 예외의 순간들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중요한 길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후퇴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영면하신 세계적인 기업 회장님의 살아생전 가르침을 기리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스스로 깨닫고 냉혹하고 치열하게 노력해야 함을. 그래야만 변화와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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