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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A 이야기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0. 11. 25. 18:39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게 된다. 나 또한 그렇다. 내가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 있는 다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가족과 친구들이 아닌 후배 이야기를 먼저 하게 되었다.
나는 첫 직장인 글로벌 회사(Global Company)에 입사하면서 그곳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을 근무하게 될지 처음에는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분위기를 보면서 나와 잘 맞는지부터 탐색해야 했다. 신입 사원이었던 몇 년간은 그야말로 모든 낯선 것들을 처음부터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1990년대 입사하면서부터 외국계 기업이라서 공식적으로 주 5일 일하고 토~일요일 이틀을 쉬었다. 집과 회사 간의 거리가 워낙 멀었고 신입시절의 긴장으로 기다리던 토요일이 되면 긴장감이 풀려서 한 낮까지 늦잠을 자곤 했다.
몇 년이 지나 회사 생활에 적응이 될 때쯤 바로 붙어있는 옆 부서에 호감가게 생긴 여자 신입 사원(이후, A 라 칭하겠음)이 입사해서 나의 눈길을 끌었다. 좀 지나 회사 내 부서 간 변화가 있으면서 그 직원이 우리 부서로 이동했다. 우리 두 명은 집이 같은 동네였고 왠지 마음이 맞아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A는 어려서 외국 생활을 해서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했다. 성격도 깔끔하고 집안에서 첫째라서 그런지 나보다 3살 어리지만 막내인 나보다 성숙한 면도 있었다.
그즈음 나도 나의 첫 차를 구입했다. A도 마침 운전을 하고 있었어서 우리는 그 당시 '카풀(Car pool)'을 하기로 했다. 하루는 내가 운전하고 하루는 A가 운전하며 출퇴근을 함께 했다. 집과 회사 위치가 워낙 멀어서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해 우리는 일찌감치 회사에 도착하여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근무를 시작했다. 식성도 잘 맞고 음악이나 취향도 비슷하여 운전하며 오가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퇴근 시간 무렵이 되면 서로 개인 약속 여부를 타진하고 별 일이 없으면 역시나 함께 퇴근했다. 칼퇴근을 하여 퇴근 정체 시간을 피하거나 업무가 길어져 교통 정체 시간이 되면 차라리 집으로 가는 길에 옆길로 빠져서 식사를 하고 놀다가 집으로 향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마포 맛집을 찾거나, 신촌으로 가서 저녁을 먹은 후 차 안에서 즐겨 듣던 음악 노래를 직접 부르기 위해 노래방을 가기도 하고, 홍대 앞의 재즈 카페로 가서 즐기기도 했다. 불금이 되면 아예 집 방향이 아닌 외곽으로 빠져서 계절에 따라 그 시기를 즐기기도 했다. 주말에 각기 별 다른 계획이 없으면 우리는 급만남을 갖으며 어느 한 명의 집으로 가서 중국 음식을 시켜 먹거나 집 근처 주점으로 가서 한 잔을 즐겼다.
A는 남동생 한 명이 있었으나 그나마 미국에 살고 있어서 거의 외동딸이나 마찬가지였고 언니가 없었다. 나는 그 당시 이미 3명의 언니들이 다 결혼을 해서 나 혼자 남았고 여동생이 없었다. 내 친한 친구들은 그 시기에 저마다 결혼을 하고 첫 애를 낳고 사회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정신이 없는 시기였다. 그러니 A와 나는 더욱 서로에게 의지하며 언니, 동생 하며 잘 지냈고 신나게 놀고 다녔다.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가 붙어서 노는 모습을 보면서 결혼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하셨던 것 같았다.
물론 우리 둘 중에 하나, 아니면 동시에 우리 둘 다 남자 친구가 생기기도 했지만, 워낙 출근시간부터 같이 하니 우리의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우리는 회사 업무와 개인 사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친했고 원래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가 더 많은 법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젊은 시절의 고민, 미래의 계획 등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A가 드디어 결혼 결심을 알려 왔다. 약혼을 한 후 망설이다가 (흔히들 겪는 결혼 결심에 대한 망설임) 흐르는 강물처럼 결혼에 이르렀다. 그 당시에는 있었던 '함' 들어가는 날, 집이 워낙 가깝고 부모님도 우리 둘의 친한 관계를 아셔서 나는 부담 없이 구경을 가기로 했다. A 커플의 친한 또래 친구들이 참석하였으니 나는 그냥 직장의 친한 동네 언니로 평범한 차림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놀러 갔다가 결국 새벽까지 함께 놀았다.
A는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신랑의 유학길을 따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딸 하나 잘 키워 시집보낸 A 부모님의 마음도 허전하셨겠지만 몇 년을 함께 한 내 마음도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A가 미국에서 생활했던 몇 년 동안 나는 외롭지만 나 만의 또 다른 생활을 만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리운 A와 그 당시 손편지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다. 음악 취향이 같은 A에게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녹음하여 보내 주기도 했다. 참으로 아날로그적인 방식과 그에 맞는 감성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또 다른 직장 후배 B를 만나게 되고, 내가 A에게 보내는 손편지에서 B를 언급하였다고 A는 기억했다. 그 당시 나는 B를 소설 '키다리 아저씨'에 나오는 여주인공인 '줄리'같은 아이라고 묘사했단다.
몇 년이 지나고 A가 한국으로 돌아왔고, 너무나 다행히도 우리 회사에 자리가 있어서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B를 만난 A는 내가 왜 B를 좋아하고 친해졌는지 금방 알겠다고 했고 그렇게 우리 3명은 서로 좋은 관계를 쌓아갔다. A는 자신의 신혼집에서 손수 내 생일상을 차려 주기도 하는 다정함을 보였다.
세월이 흘러 A는 딸을 낳고 육아와 직장 생활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잘하고 싶었던 A는 심한 스트레스와 바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던 어느 날이었다. 너무 놀라 병원에 A를 만나러 갔고 며칠 후 조금 회복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으나 다시 며칠 후 더 악화되었다. 왜 그런 일이 A에게 발생되었는지 마음이 아팠다. 꾸준한 치료에 아주 조금씩 회복하던 중, 회사 생활은 접게 되었다.
또다시 A가 없는 회사 생활이 지속되었다. A에게 신경이 쓰이면서도 바쁜 직장 생활 속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좀 다른 인생살이가 시작되었다. A는 나의 결혼이 늦어진다고 여겼지만 아직까지도 미혼 상태일 것이란 예상은 못했다. 이제 A의 딸은 대학생이 되어 아름다운 젊음을 즐기며 얼마 후, A와 내가 만나 즐겼던 시기와 비슷한 때에 이르게 될 것이다.
A는 이제 젊은 시기에 앓았던 병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일상을 여유롭게 보내고 있다. A만의 자리에서 아내, 엄마, 딸, 며느리 등의 나와는 또 다른 역할들을 하면서 잘 나이 들고 더욱 성숙한 여자의 일생을 보내고 있다.
내가 지난 년 초에 수술을 하게 되고 병원에 입원했던 사실을 뒤늦게 알리자, 마구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해댔다. 많이 섭섭했나 보다. 나는 그냥 그런 성격의 사람인데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가 보다. 가만히 A가 아팠을 때의 내 심정을 생각하니 A가 화를 내는 마음이 이해가 됐다.
나는 아직도 나 위주로 생각하는 개인주의자인가 보다.
* Note :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족으로 연결되는 것은 기적이다. 친구라는 관계를 맺게 되는 것 또한 운명적인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직장이라는 사회생활은 회사와 개인의 서로 필요에 의하여 엮어지는데 그 안에서 평생 가는 인연을 만나게 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3살 나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고 또 다른 의미의 친구이다, 소중한 절친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A는 젊어서 아팠으니 이제 더 이상 아프지 말길,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내 곁에 머물러주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리고 A와 나의 여기까지의 인생을 뒤돌아 보면서 인생의 길은 참으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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