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찌민 근무.. 도착, 그 일주일 :: Aunt Karen's Note (카렌 이모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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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 호찌민 근무.. 도착, 그 일주일
    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1. 1. 6. 18:56

    2013년 12월 초부터 2014년 6월 초까지 6개월간 베트남(Vietnam)의 호찌민(Ho Chi Minh)에서 살게 되었다. 오랜 세월 근무했던 글로벌 회사(Global Company)의 6개월간 업무 일정("Global Special Project"라는 이름으로)으로 해외 파견을 나가게 된 것이었다.

     

    2013년 12월 초, 서울로부터 호찌민으로 향하는 직항 비행기 편에 탑승한 후, 여러 생각과 상념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1997년에 젊은 나이로 한 달 조금 넘게 필리핀 지사로 가서 파견 업무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업무 기간도 짧았고, 나의 부모님도 건재하셔서 별 다른 고민 없이 그저 긴장된 마음만으로 마닐라에 도착한 기억이 있었다.

     

    2013년의 상황은 달랐다. 아빠의 빈자리와 엄마의 건강상의 이유로 마음 한편이 불안하고 걱정되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희생과 협조를 등에 업고 결정을 내린 상황이니 '나'만 잘하면 된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회사에서의 나의 업무 역할의 폭을 넓혀 보고 싶기도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또 다른 나의 능력을 발휘해 보고, 그동안 성장통을 겪었던 나의 리더십에 획기적인 실험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살면서 그때까지 별로 크게 못 느꼈던 나의 사회 경력의 야망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내 안의 나에게 그렇게까지 야망이 꿈틀대는지 몰랐다.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필요한 짐을 준비하다 보니 커다란 가방 2개와 작은 휴대용 가방이 만들어졌다. 토요일 대낮에 호찌민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챙기고 출구로 나오자 동남아시아의 무더운 기운이 훅 하고 나를 반겼다.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내 이름이 씐 팻말을 들고 한 여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베트남 사회는 일반적으로 토요일 이른 오후까지 근무를 하지만, 글로벌 회사인 우리 회사는 모든 나라가 동일하게 토~일요일은 휴일이었다.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도착 절차를 위해 호찌민 지사의 여직원(이후, S라 칭함)이 마중 나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동안 이메일로 나를 위한 베트남에서의 여러 절차를 준비해 주던 S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는 많은 짐을 가지고 사방을 둘러보는 나를 보며 왠지 감이 왔다고 해서 우리는 웃으며 첫인사를 했다. 30분가량 차로 달려 도착한 시내의 호텔식 거주지는 당분간 1주일만 머무르기로 되어 있었다. 앞으로 6개월간 머무르게 될 외국인들을 위한 거주지(Residence)의 계약은 내가 도착한 1주일 후에나 장기 거주 계약이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그 당시에도 호찌민은 경제 도시인만큼 세계 각지의 글로벌 기업의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여러 유럽 국가들과 아시아 각지에서도 관심이 많았던 만큼 세계 각지에서 파견된 외국인들을 위한 여러 형태의 거주지가 많았다. 게다가 호찌민과 인근의 캄보디아 씨엠립 같은 곳은 그 당시에도 일찌감치 세계 각지로부터 몰려든 관광객들이,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한 이른바 "한 달 살아보기" 같은 형태의 머무름이 성행하는 도시였다. 원룸부터 시작하여 주택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거주지를 살펴보고 각자의 취향에 맞춰 기간별 계약을 하는 것이었다.  

     

    사전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호찌민 지사에서 현지 상황대로 알아보고 몇 개의 추천지를 미리 이메일로 주고받은 후, 결정을 한 상태였다. 6개월이라는 길고도 짧은 기간 동안 나는 그냥 편하게 도보로 출퇴근이 가능한 도심 지역에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오피스텔 같은 거주지로 결정을 했었다. 그곳으로 입주하기 위해 1주일을 기다려야 해서 같은 지역의 호텔식 건물에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여러 수속 절차를 밟은 후, S는 월요일 아침에 만나서 새로운 지사 사무실로 같이 가기로 하고 떠났다.

     

    어차피 1주일 후에 다시 이사를 해야 했으므로 호텔방으로 들어가서 간단한 짐 만 풀었다. 잠시 더위를 식히고, 서울 가족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동네 탐방을 나섰다. 출장으로만 왔던 나라에서 6개월을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설레기도 하고 긴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치안이 안전하여 처음부터 혼자서 동네 탐방을 해도 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점이었다. 간혹 모바일 폰을 표적으로 삼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한 소매치기가 있다고는 했지만 귀중품을 조심하면 심각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했다. 

     

    12월 초이니 늦은 오후부터는 한결 괜찮은 기온으로 내려갔다. 방향 감각이 떨어지는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듯 연신 고개를 돌려 확인하면서 다녔다. 하지만 너무 어리바리한 외부 사람같이 보이지 않으려고 눈치도 살폈다. 호텔을 나와서 한 번 우회전을 하니, 2차선 도로이지만 여기저기 편리하게 이용할만한 가게들이 보이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 거리가 나왔다. 그 길을 주욱 걸으니, 베트남 음식점과 함께 일식, 이태리 피자집, 프랑스식 등 여러 나라 레스토랑들이 줄지어 있었다. 중간에는 편의점이 있고, 좀 더 가니 커피빈과 뚜레쥬르 베이커리 전문점이 보여서 반가웠다. 대충 거리를 살펴보다가 깔끔해 보이는 일식집으로 들어가서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초밥과 메밀 세트 메뉴가 괜찮게 나왔고, 맥주를 곁들여 즐겼다. 물론 베트남 음식도 좋아하지만 왠지 그 날 혼자 먹기엔 그 메뉴가 딱 좋았다. 

     

    도착의 긴장을 풀고 일요일 늦게까지 늦잠을 자다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밝은 빛에 눈을 떴다. 1주일을 묶는 호텔식 주거지는 신식 건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특히 아침 식사를 하는 2층의 레스토랑은 가든을 개조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느지막이 내려간 레스토랑에는 외국인 몇 명이 여유롭게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서양식과 베트남식 음식이 골고루 있어서 아침 식사를 하기엔 충분했다. 나도 여유롭게 일요일 오전 첫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 후, 1주일 동안 아침 식사를 하면서 관찰하니 그곳은 주로 유럽인들이 장기간 머무르며 휴가를 보내는 것 같았다. 나 만 출근 준비를 하고 잠시 서둘러 식사를 했고, 다른 외국인들은 매우 편한 옷차림으로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식사를 즐겼다. 여느 비즈니스호텔과는 달리 투숙객들이 시간대를 달리하며 내려가서 그런지 붐비지 않았고, 레스토랑에서도 한 명 한 명에게 신경을 써주며 친절해서 며칠 후에는 포근한 가정식 식당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이사를 한 후에도 가끔 한가한 주말에는 그 식당을 일부러 찾기도 했었다. 

     

    당장 내 손에 주어진 것은 베트남 관련 관광 책자와 호찌민 시내 지도가 전부였다. 베트남 여행 책자는 거래처 중 친한 지인이 서울을 떠날 때, 잘 다녀 오라며 주었다. 그 책은 이후, 6개월 내내 요긴하게 사용하였는데, 책이 두꺼워서 지역별로 나누어 가지고 다녔다. 그 책 뒤편에는 캄보디아 씨엠립 부분도 함께 있어서 아주 좋았다.  

     

    드디어 베트남 호찌민 지사로 첫 출근을 하는 월요일 아침이 되었고, S가 로비로 나를 데리러 와 주었다. 호텔을 나와 내가 주말에 동네 탐방을 다녔던 거리로 가더니 그 거리에 있는 좀 높은 빌딩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의 8층에 우리 회사가 있었다. 규모가 있는 건물의,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근무자들이 몰려들어 붐비다 보니, 정복 차림의 관리인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원 조절을 하면서 차례로 엘리베이터에 오르게 했다. 왠지 사회주의 냄새가 약간 나기도 했지만 질서 정연해 보이고 오히려 시간 절약이 되는 것 같았다.

     

    8층에 위치한 우리 회사 사무실에 도착하니 지사 책임자이자 나의 멘토 (이후, G로 칭함)가 환호하며 반겨 주었고, 그동안 여러 번의 출장으로 안면이 있었던 직원들과 먼저 인사를 하고, 이어 처음 보는 모든 직원들과도 인사를 했다. 그 시기에는 호찌민에 22명 정도, 하노이의 6명, 모두 28명이 G의 책임하에 있었고, G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와 태국 지사의 일정 업무도 관할하고 있었다.

     

    이어 마련된 나의 자리로 가서 정리를 시작했다. 시작 일주일은 그야말로 정착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베트남에서 편하게 사용할 모바일 폰을 개통하고, 입출금을 위한 은행 계좌 개통 등 행정적인 업무는 항상 S가 담당하여 도와주었다.

    G는 오전 오후 시간표에 따라 베트남 업무를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었다. 이제 6개월간의 특별 프로젝트를 위한 팀의 리더들로는 G가 최고 책임자이고 나, 그리고 다른 업무를 담당하는 리더(이후, P로 칭함) 이렇게 3명의 리더들 구성이 완성되었다.

     

    만약 어떤 이유로든지 베트남에서 살게 되고 더구나 일까지 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거주를 위한 수속과 절차 등 준비 과정들이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름 글로벌 회사의 울타리 안에 있었고, 게다가 끊임없이 해외 외부로부터 파견된 외국인 직원들 경험이 많았던 호찌민 지사와 S의 도움으로 그런 행정적인 부분들이 해결되었다. 6개월의 파견 업무를 위한 비자, 거주지 계약 등 큰 문제부터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소한 점들까지 S는 살뜰히 챙겨 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빠르게 업무 파악을 해나갔고 며칠 안되어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부터 시작하고 속도를 내야 하는지 파악이 되었고 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워낙 한국인에 대한 믿음이 강한 회사 임원진과 G는 그런 나의 모습에 다시 한번 경이로워했다.

     

    G가 환영의 의미로 점심식사를 대접한다고 했다. 식사를 위해 둘이 거리로 나갔다. G는 나를 위해 사무실이 있는 그 거리 주변의 맛집들을 가리키며 소개해주며 걸었다. 유독 일식집이 많은 그 거리는 알고 보니 일본인들의 동네라고 할 만큼 일본 사람들이 많이 유입된 지역이라고 했다. 그 사이사이 길로 들어가면 한식 분식점 같은 곳도 보이고, 멕시코나 지중해식 레스토랑, 중식당도 있고, 내가 첫날 발견했던 것보다도 세계 각지의 음식들을 골고루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내가 호찌민 출장을 갈 때마다 묶고 좋아하는 호텔이 나왔다. 거리의 뒷골목으로 걸어서 거기까지 도달했던 것이었다. 호텔 옆의 이런 곳에 또 골목이 있을까 싶은 좁은 골목 거리로 들어가니 또 다른 세상이 나왔다. 여러 나라 레스토랑이 또다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중,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더니 마치 그 근처의 모든 외국 직장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듯했다. 간단한 점심 세트 메뉴로 결정한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외국인들 속에서 G와 나 또한 그런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G는 내가 우리 가족 중, 막내딸인 것을 알고 있었다. 내 가족들의 안부와 나의 해외 근무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 나의 심정 등 세세한 질문들을 했고, 나는 진심을 농담에 담아 답변해 주었다. 우리는 맛나게 식사를 즐기면서 앞으로의 행보를 계획하고 서로 응원을 다졌다. 

     

    빠르게 적응해 나간 1주일이 지나고 다시 주말이 되었다. 토요일, 드디어 6개월 동안 거주할 건물로 이사를 해서 입주했다. 회사 사무실 건물과 일직선상의 같은 거리에 있는 현대식 건물이었다. 짐을 풀고 정리하면서  또 다른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내가 베트남의 경제 도시인 호찌민에서 6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근무를 하게 되다니, 인생에 있어서 뜻밖의 깜짝 이벤트 같았다.

     

    * Note :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출장 업무를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그 사이 휴가를 통해 몇 군데 해외 나라들로 놀러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잠시 머무름과 달리, 일정 기간 머무르며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가짐이 좀 달라졌다.

     

    6개월이라는 생각하기에 따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기간 동안,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 나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회사라는 울타리가 공식적으로는 나를 보호해 주겠지만, 어쨌든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오롯이 혼자만의 생활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미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서울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난 괜찮다고, 문제없다고, 잘해나가고 있다고 안심시켜 주어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래야 했다. 그 시작의 시기에 혼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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