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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남사친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1. 2. 17. 19:21
새로운 밀레니엄(Millennium)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2000년의 일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해의 앞자리 숫자가 1에서 2로 바뀌는 2000년이 되면 도대체 내가 몇 살인가 계산을 한 후, 너무나 먼 미래의 시간, 나이가 적지 않은 성인의 시기라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2000년의 세상과 나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대학 졸업식을 앞둔 1991년 말에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회사(Global Company)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 몇 년간은 일 배우기에도 바빴고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 회사의 분위기, 임원진과 선배님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후, 열심히 일한 결과로 점차 승진을 하게 되었고 어느덧 혼자 일을 책임지고 독립적으로 해야 하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2000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미국 본사로 출장을 가게 되는 기회가 생겼다. 그 당시 회사의 본사는 뉴욕에 있었고, 주된 업무 관계가 있는 곳은 미국의 다른 주에 있어서 두 곳을 모두 방문해야 했다.
옆 부서의 동료와 함께 2명이 처음으로 뉴욕행 직항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둘 다 뉴욕은 첫 방문이어서 기대가 되기도 했고 본사에서의 출장 업무에 긴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서로에게 의지하여 며칠 간의 본사 업무 일정을 무사히 진행할 수 있었다. 주말을 뉴욕에서 보내고 일요일 낮에 다른 주로 이동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뉴욕에서 그냥 주말의 여유 시간에 구경하기로 했었는데 마침 동료의 업무상 지인이 우리에게 뉴욕에 거주하는 2명을 소개해 주었다. 사실 도착한 첫날에는 회사 일정이 없어서 우리 둘은 뉴욕 도심을 둘러볼 수 있는 관광 코스 버스로 짧게나마 시내 구경을 했었다. 금쪽같은 주말 시간에 무엇을 선별하여 구경하는 것이 좋을지는 결정을 못했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호텔로 우리를 만나러 와준 2명 덕분에 짧은 시간이지만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어려서 이민을 갔다고 했고 나머지 한 명은 회사 파견 업무로 가서 정착을 했다고 했다. 그 2명 덕분에 뉴욕의 중요한 부분을 둘러볼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만나서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섬까지 배를 타고 갔다 오고, 그 유명한 월가(Wall Street)와 시내 중심부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 쌍둥이 빌딩, 록펠러센터(Rockefeller Center), 타임스퀘어(Times Square) 지역 등을 구경하고 오후에는 소호 지역과 콜롬비아 대학 캠퍼스도 경험하는 등, 그들의 차량으로 기동력 있게 움직이며 제한된 시간에 많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도로의 한 블록 사이로 부자들만 살고 있다는 업타운과 바로 이어지는 할렘가를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극명한 단면을 마주하기도 했다. 우연인지 우리가 업타운을 지나갈 때, 유명 가수 빌리 조엘(Billy Joel)의 'Uptown Girl'이 흘러나와서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뉴욕의 야경은 뉴저지에서 봐야 그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며 저녁이 되어서는 뉴저지로 넘어가서 든든하게 저녁 식사를 한 후, 강 가의 공원에서 뉴욕의 야경에 빠져 한동안 온갖 감성에 취해 있었다. 처음 만난 2명이 든든하게 가이드 역할을 해준 덕분에 과분한 구경을 했다며 감사를 표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일정을 위해 떠났다.
그 출장을 계기로 서울로 돌아와서도 우리는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처음엔 단순한 감사 인사로 시작하였는데 어느새 그중 한 명인 K와 친해져서 이메일을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다. 주말을 함께 보낸 4명 중에 그와 나만 그 당시 싱글이었으니 마음의 부담 없이 더욱 편하게 느껴졌었다.
이후, 겨울에 그가 한국 방문으로 잠시 들어왔을 때 만나서 여름 출장 중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 맛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어린 시절 이민을 간 그는 나보다 3살 어렸고 그래도 한국말을 서툴지 않게 구사했다. 그 시절만 해도 3살이 어리면 나는 그저 동생으로 어리게 봤던 것 같으나, 사실 그는 꽤 성숙된 면도 있어서 함께 있으면 친구 같았고 대화도 잘 통했다. 미국식 마인드로 그는 나를 누나라기보다는 친구로 여겼다.
이후에도 계속 이메일로 소식을 전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그다음 해 10월에 휴가를 얻어서 다시 뉴욕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사실 2000년 미국 출장 당시 그들은 열심히 나와 동료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작은 실수로 인하여 사진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짧은 기간 구경의 아쉬움과 사진도 사라졌으니 시간을 두고 본격적인 여행을 계획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10월 출발을 앞두고 한 달 전에 9.11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너무 놀라서 여행 계획을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그의 의견에 따라 뉴저지에 숙소를 정하기로 하면서 예정대로 출발했다.
내가 다시 도착한 뉴욕은 이미 쌍둥이 빌딩 자리와 그 주변이 폭격의 상흔으로 상처와 어두움, 슬픔에 휩싸여 있었지만 또다시 재건의 의지가 엿보이기도 했다. 뉴욕의 가을, 10월에 열흘 정도 머무르며 나는 낮 시간에는 나 혼자 뉴욕의 여기저기를 관광하며 돌아다녔다. 유명한 뉴욕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을 구경하기도 하고,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기도 했다. 그가 퇴근한 후 시간과 휴일에는, 예약해둔 뮤지컬 공연도 관람하고 날려버린 사진의 옛 장소를 찾아 다시 찍기도 했다.
다음 해인 2002년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렸던 해, 나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정신없이 응원하며 놀았다. 내 인생 전체를 통해 그렇게 열정적으로 놀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밤낮없이 월드컵 경기에 빠져있는 동안 연락이 뜸하자 K는 그동안 내가 결혼이라도 하며 바빴나 보라고 농담을 하여 웃었다.
다음 해 인가, K가 다시 서울을 방문했고 그 이후로 나도 몇 번 미국 출장을 가게 되면 일정의 전이나 후로 시간을 내어 K를 만났다. 그렇게 온/오프로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남사친, 여사친 같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2000년대 중후반 어느 때인가 그는 오랜 기간 사귄 여자와의 결혼 소식을 알려왔고, 나는 그의 결혼식에 초대되기도 했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기분이 오묘했다. 왠지 동생 장가를 보내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남사친을 잃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정을 쌓고 대화가 잘 통해서 이메일이나 채팅 등으로 서로의 이야기와 고민도 많이 나눴고, 가끔 서울과 뉴욕에서의 만남으로 추억도 만들었던 나의 남사친과 이제는 왠지 거리를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보다도 더욱 가족 중심 문화인 미국에서 그는 이제 가정을 꾸렸고, 와이프도 동반한 식사 자리도 했었지만 더 이상은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바쁜 생활 속에서 연락이 자연스럽게 뜸해졌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로 흐르면서 나도 회사 내에서 점차 리더의 자리에 오르고 막중한 책임감과 업무에 정신이 없었다. 가끔 그에게 아이들이 생겼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언제 한 번 연락을 해야지 하면서도 또다시 잊고 세월은 그렇게 무심하게 흘렀다.
몇 년이 후딱 지나가자 이제는 예전의 이메일 주소로 연락을 하면 되는지, 너무 오래간만에 연락을 하면 뜬금없을 것 같기도 했다. 문득 지난날의 우리의 대화가 생각났다. K는 왜 남자와 여자는 절친 사이가 지속될 수 없는지, 누군가 한쪽이 먼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만남이 자연스럽게 끊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상황이 되자 나 또한 왠지 K의 배우자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남편, 아이가 생겼다면 아빠로서의 역할을 할 시간에 짧게라도 함부로 방해를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K는 과연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지내왔을까.
그렇게 10여 년 간의 인연이 사그라드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 Note : 누군가 나의 옛이야기를 들으면 꽤 로맨틱했다고 부러워할 수도 있겠다. 나도 나의 30대의 추억이 남의 일 또는 꿈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이 드넓은 세상에서 지구 반대편 도시에 사는 인연을 알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추억이었다.
더군다나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가끔 만날 때는 맛난 음식을 먹으러 다니고 좋은 장소를 찾아가서 경험을 공유했다. 그러다가 특별한 이유 없이 서로의 소식이 끊겼다.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 였나 보다. 실제로 바쁘기도 했지만 그것을 이유로 어쩌면 서로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인연이 거기까지라도 괜찮고, 그 이상의 특별한 인연이나 운명의 기회가 있다면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마주칠 수도 있겠지 라고 여겨졌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냥 내버려 두어야겠다.
한 시절이나마, 우리의 추억으로 이미 나는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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