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불다 다친다.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0. 8. 15. 23:07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경우에 따라서 다른데, 어떤 면은 급한 것도 있고 또 어떤 면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나이가 들수록 하기 싫은 일을 맨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려나는 것 같다. 마음먹고 하면 예상외로 빨리 끝날 수도 있는 일도 미루는가 하면, 그 미루는 일을 하기 전에 다른 모든 소소한 일들을 먼저 해버리곤 하는데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기한이 정해져 있는 일은 주로 그 날이 되기 전에 미리 끝내어 놓는다. 결국 따로 기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 해야 하는, 그러나 하기 싫은 일만 뒤로 계속 처지는 것이다. 내 안에 부지런함과 나태함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나 보다.
걸음걸이는 원래 매우 빨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 닮은 것 같다. 엄마께서는 싱싱 생생 소리가 날 정도로 빨리 걸어 다니셨다. 솔직히 나는 내가 그렇게 빨리 다닌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오히려 직장생활을 그만둔 이후였다. 직장생활을 하던 시기는 어차피 사무실 내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티가 나지 않았고, 점심시간에도 동료들과 다닐 때 보조를 맞췄다. 단지 혼자 다닐 때는 직진 본능이 좀 강했다. 내가 목표로 하는 지점까지는 별로 한 눈을 팔지 않고 갔다. 걸으면서 물론 주위를 보긴 하지만 그다지 주의 깊게 관찰하거나 의미 있는 구경을 하지 않았나 보다. 놀라운 광경이나 신기한 일이 벌어지면 당연히 보긴 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고 지나친다. 이 또한 방향 감각이 없고 길치인 자의 특징인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 한복판에서도 해외에 나가서도, 새로운 장소를 찾아가야 할 일이 생겨서 가보면 결국은 내가 알고 있던 거리에 버젓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다니던 거리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평소에 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확실히 남들보다 직진본능이 심한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목표로 한 곳으로 나도 모르게 빠르게 질주하나 보다.
오랜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쉬면서 휴식기를 가졌다. 그러자 내가 사는 거주지역에서 돌아다닐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단지 내 상가 그리고 가까운 주변 동네들을 주로 걸어 다닐 기회가 많아졌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는 나의 3번 언니네 가족들도 살고 있다. 가끔 단지를 걷다 보면 조카들(3번 언니의 아이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 또래로 보이는 얘들이 보이면 내가 눈여겨봐서 그런지 내 눈에 먼저 띄곤 했다. 어느 날인가 나는 평소 내 걸음 속도로 걸었을 텐데 며칠 후, 형부가 퇴근길에 저 앞에서 누군가 쌩 하고 지나가서 아는 사람 같아서 다시 봤는데 바로 사라졌다고 했다. 3번 언니 말에 의하면 인상착의로 봤을 때, 분명 나였단다. 집 앞 길 건너에 있는 짐(GYM)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짐의 직원들 거의 모두가 내가 회원임을 인식했다. 어느 날 짐을 가니 직원 중 한 명이 내게 와서 엊그제 길에서 나를 봤는데, "회, 회, 회원님~~~" 하고 아는 척하려 했는데 내가 벌써 지나쳐버렸다고 하며 무슨 급한 일이 생긴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아마도 평소대로 걷고 있었을 것이었다. 아무 급한 일 없이.
그런 이야기들이 종종 내 귀에 들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 빨리 걷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3번 언니가 직접 목격했단다. 단지 내 지하상가로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나를 발견한 언니가 나를 부르려고 했는데 이미 아래로 없어졌단다. 그렇다, 난 보통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지 않는다. 그냥 조르르르 내려간다.
이런 사실들을 우리 4 자매들이 있는 단톡 방에서 3번 언니가 고발했다. 나는 내가 다른 데서 들은 이야기들을 고백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나는 쓸데없이 빠른 직진형 인간이었다.
몇 년 전, 어느 날 저녁에 나의 가장 절친들인 대학 동창들과 번개 만남으로 치맥을 하기로 했다. 유명하고 좋아하는 프랜차이즈 치킨집이 우리가 자주 모이는 동네에 새로 생겼단다. 나는 맥주를 마실 생각에 전철을 타고 그 지역에 도착했다. 새로 생긴 그 장소를 찾기만 하면 되는데 주욱 도로를 따라서 걷다가 순간 이상해서 뒤를 돌아봤다. 내 친구들 중에 한 명이 황급히 어디선가 나와서 나를 불러 세웠다. 웃으면서 달려 들어가서 친구들과 신나게 만남을 즐거워했다. 그 안에서 창밖으로 분명히 내가 보였는데 쌩~ 하고 그냥 지나쳐 가더란다. 그래서 그중 한 명이 나를 붙잡으려 튀어나왔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어딘지도 모른다며 그렇게 빨리 다니는 것은 무슨 경우냐며 기 막혀했다.
그 후, 나는 의식적으로 속도를 좀 줄이고자 노력해 보았다. 어느 날 집 앞 건너에 있는 거리를 걷다가 반가운 장소를 발견했다. 성수동에서 시작한 유명한 베이커리가 우리 동네에 분점을 낸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자랑하듯 4 자매 단톡 방에 올렸다. 3번 언니가 등장, "동생아, 그 집.. 거기 생긴 지 6개월은 넘었는데.. 그 길 오늘 처음 갔나 봄?"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났는데 우리 4명은 제 각기 강/약점이 다르다. 내가 이렇게 어디에 뭐가 있는 줄도 모르고 다니는 것을 제일 이해 못하는 일인은 1번 언니이다. 1번 언니는 위치, 방향 감각과 눈썰미가 탁월하다. 그 길을 지난 6개월 내에 여러 번 다녔다고 고백하니 세 명의 언니들이 난감해하며 까르르 웃었다.
그 이후로 나는 엄마에 이어 "싱쌩이"가 되었다. 그저 급한 일이 없어도 종횡무진 싱싱 쌩쌩 다녔던 것이었다.
직장을 그만둔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나 스스로를 부지런히 굴렸다. 영어도 나에겐 외국어이니 사용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릴까 봐 영어학원을 등록해서 다녔다.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어느새 몇 가지 일들이 나의 루틴(Routine)한 일상이 되면서 평일에 단 하루라도 집에만 머무르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삼성동 코엑스에서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마지막 은행 업무를 보려고 특정 은행을 찾아가려고 했을 때였다.
몇 미터 앞에 보이는 은행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떼었다. 한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더니 이내 순식간에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내 발 바로 아래 단 몇 개의 계단이 있었다. 긴 계단이라면 높낮이가 현저하여 바로 느꼈겠지만 은행을 발견하고 평소처럼 가속도가 붙어서 걸어오던 중에 바로 앞 계단 몇 개가 인지되지 않았나 보다. 보통 넘어지려고 할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양 손이나 어느 한 손으로 땅을 집어서 손목 골절이 쉽게 온다고 한다. 나는 순식간에 붕 뜬 몸이, 마치 개구리가 네 개의 팔다리를 쭉 펴고 대자로 넘어지듯 계단 아래 바닥에 앞으로 대책 없이 넘어졌다. 양 손에 들고 있었던 가방과 모바일폰을 날리고, 양쪽 다리 무릎이 제일 먼저 착지했다. 차가운 대리석 같은 돌바닥 위로. 때는 2018년 9월 초, 아직 늦여름으로 더워서 맨다리였다. 순간 우직 끈 하면서 무릎에서 이상 신호가 왔다. 점심시간이 지나 한적한 오후 시간이라서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나는 창피할 겨를도 없이 그저 내 몸의 이상을 파악해야 했다. 주위를 지나던 몇 사람 중에 너무 걱정스러웠는지 내 가방과 모바일폰을 주워주며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고 일어나서 주변의 앉을 곳을 찾아 잠시 앉아서 정신을 수습했다. 일단 양 팔/손은 괜찮았다. 양다리/무릎이 문제였는데 어느 정도 심각한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119를 부를까도 생각했지만 그 정도는 아닌 듯하여, 마침 길 건너에 위치를 알고 있는 정형외과 병원으로 조심스럽게 천천히 갔다. 오른쪽 무릎이 더 심각한 듯했다.
정형외과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왼쪽 무릎은 다행히 타박상 정도였으나 오른쪽은 심각했다. 이후 큰 종합병원으로 옮겨져서 더 자세히 검사 후, 2주 석고 깁스 판정이 났고 그 이후로 또다시 탈부착 깁스로 4주를 해야 했다. 무릎 뚜껑뼈에 가로로 금이 가서 자연히 붙을 때까지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야 했다. 다행히 수술까지 가지는 않았고 다른 부위도 이상이 없었다. 나이가 반 백 살이 넘었을 때, 뼈 골절이 되었으니 그만큼 조심해야 했다. 늦여름~초가을 시기에 철갑을 두른 듯 한, 거의 한쪽 다리 전체 깁스를 했으니 에어컨을 틀고 가만히 누워 있어도 더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매일 나가 다니던 나 자신은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렇게 도를 닦는 생활을 하면서 속으로 '하나도 급할 것이 없다..' 하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버텼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다행히 뼈는 다시 굳어갔다.
골절 후 1년이 지난 작년 가을이었다. 그때는 이미 정상적인 걸음걸이로 돌아와 아무도 내가 절뚝거리는 것을 인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가족들도 내 골절을 잊어갔다. 어느 날 단지 상가로 가다가 3번 언니를 상가 문 앞에서 마주쳤다. 언니는 나를 발견하고 반가워하며 내 손목을 잡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언니, 나 도망가지 않아.. 이제 쌩쌩거리고 다니지도 못해' 하고 생각했다.
올해, 2020년 봄이 되었다. '코로나 19' 사태를 맞이하여 모두들 행동반경을 줄여 나갔다. 아파트 단지 내에 벚꽃을 비롯한 온갖 아름다운 봄 꽃들이 만발할 때였다. 나는 가끔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 산책을 즐기기 시작했다. 벚꽃이 만발한 길에서 잠시 멈춰 서서 꽃 향기에 취해 있을 때, 3번 언니와 또 마주쳐서 30분이 넘도록 꽃 길에서 일상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3번 언니가 4 자매 단톡 방에, 나와 우연히 만나 담소 나눈 이야기를 했다. 1&2번 언니들이 나를 놓치지 않고 만나서 30분 이상 길가에서 수다를 떤 사실에 놀라며 농담을 했다. '나 참.. 언니들, 나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그건 좀 더 젊었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어린 시절 내가 뛰어놀던 때 생각이 났다. 나는 언니들이 모두 학교에 간 시각에 혼자 놀아야 했다. 당연히 골목을 휘젓고 다니며 골목대장처럼 신나게 뛰어놀았다. 어렸을 때 다친 상처가 아직도 다리 곳곳에 자세히 보면 남아있을 정도였다. 부모님께서 그럴 때마다 하신 말씀, "까불다 다친다" 나이 반 백 살 때도 쌩쌩거리고 다니다 다쳤다.
* Note : 2018년 9월에 나는 이미 겪었다. 집 콕 생활을. 사회로부터 스스로 어쩔 수 없이 격리되었다.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필요 없이 서두르지 않아야 함을 배웠다. 그리고 그 당시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옛날 부모님께서 말씀하신, 까불다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코로나 19 바이러스 유행 후, 반년이 넘도록 사회적 거리두기가 요구되고 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닌 나는 요즘 또 다른 나만의 루틴 한 일상의 패턴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루틴은 차츰 습관화되고 있어서 예전만큼 매일 밖을 나가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그래도 가끔 언론매체에서 이제 코로나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기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두렵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아니었어"라는 글귀가 와 닿는다. 그만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일상은 이제 소중한 추억이 되었고, 그 추억이 다시 현실이 되길 바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
하지만 꼭 밖이 아니더라도 집 안, 가정 안에서 보내는 시간 또한 여유롭고 평안하다는,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각자만의 루틴을 발견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이 나중에 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아닌, 특별함으로 기억되고 이 또한 추억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도 항상 명심하자, 까불다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삶의 소소한 멘토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수와 잘못된 판단의 연속... 직장생활 (0) 2020.08.22 다리 골절상을 당하다.. (0) 2020.08.19 리더십 평가 (Leadership Assessment) (0) 2020.08.12 그 또한.. 인연이겠지요.. (0) 2020.08.08 중남미의 또 다른 모습, 니카라과 (0) 2020.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