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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우리집 막내딸로 태어났다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0. 7. 4. 23:59
그 세대가 그렇듯, 우리 아빠와 엄마도 형제자매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머리가 명석하신 아빠는 의과 대학 학업 중에 본인의 건강상의 이유로 지방에 있는 본가에서 건강 관리를 하며 교직 일을 하셨다. 그러다 엄마를 만나 다시 서울로 올라와 처음에는 출판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셨다. 서울에서 자란 엄마 역시 학업 후 곧바로 여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당시로는 키가 크셨던 아빠는 인물도 좋고 성품도 온순하셨다. 키가 아담하신 엄마는 아빠 표현으로는 손을 잡으면 엄마의 작은 손이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귀여운 여인이셨다. 두 분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고 그 영화는 내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의 사랑을 받는 영화였다. 아빠와 엄마는 부부 금실이 아주 좋으셨는데 아마 언니들은 자세히는 모를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언니들한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막내라는 이유로, 또 4 자매가 사용하기엔 방도 넉넉하지 않아서 (내 위로 언니가 3명에, 당시 맞벌이 부부인 우리 가족의 살림을 도와주는, 그 당시 명칭으로는 식모 언니가 같이 살았다) 나는 거의 초등학생이 되기 직전까지 부부 침실에서 같이 잤다. 그것도 아빠와 엄마 사이 정 중앙에서 잤다. 내 희미한 기억에도 또렷한 부분이 있다. 가끔씩 이른 아침에 도란도란 소리에 희미하게 잠에서 깰 때가 있었는데 물론 눈을 뜨지는 않았다. 내 왼쪽 자리에서 주무시던 엄마가 오른쪽 자리의 아빠 이불속에 함께 계셨다. 두 분이 이불을 뒤집어쓴 체 다정하고 때로는 귀여운 말들이 오고 갔다.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가 오고 갈 때는 나는 직감적으로 그냥 계속 자는 척했는데 가끔 두 분이 나를 지칭하며 깬 것 아니냐며 확인을 하셨다. 그럴 때면 나는 가슴이 콩닥거렸는데 더 눈을 꼭 감고 숨도 거의 멈추고 자는 척을 했다. 그러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언니들이 함께 자는 방으로 내 잠자리가 옮겨졌다.
그 이후로도 두 분의 금실을 가끔 확인할 수 있는 일들이 발견되곤 했다. 아주 가끔씩 엄마는 친구분들과 여행을 하시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의 아빠는 원래 여행을 아주 좋아하셔서 여행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나 관대하셨다. 다행히 1번 언니와 내가 8살 차이가 나고 순서대로 2번, 3번 언니들과 나는 6살, 4살 차이가 났는데 엄마가 며칠 여행으로 자리를 비워도 아빠와 우리 딸들은 식사와 다른 일들도 크게 문제없이 잘 해결해 나갔다. 단지 좀 놀라운 것은 엄마의 부재 시 아빠가 퇴근 후 엄마가 없는 것을 아시면서도 늘 되뇌듯이 하시는 한마디가 있었다. 우리를 한번 보시고는 "아무도 없나?" 하셨다. 난 속으로, '아니, 아무도 없냐니.. 우리가 이렇게 넷이나 있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가 여행으로부터 돌아오시면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뭔가 더 안정적이고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모두들 마음속으로 안도하는 듯했다. 난 엄마가 너무 반가워서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엄마 냄새를 맡곤 했다. 엄마가 씻고 화장품을 바를 때도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으면 아빠가 그런 나를 보며 이제 그만 방으로 가서 자라고 하셨다. '아, 이제 좀 나가 달라는 말이구나..' 하고 안방을 나왔다.
그런 아빠 엄마의 사이에서 1번으로 태어난 우리 큰 언니는 그 당시 미모가 대단했단다. 아빠가 너무 예뻐서 볼 때마다 아빠의 큰 손으로 코를 주욱 주욱 올려서 지금의 높은 콧대가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당시 엄마가 재직하시던 중학교의 국어 선생님이 꽤 유명한 학자이셨고 그분에게 의뢰하여 언니의 이름이 지어졌다. 2년 뒤, 2번 언니가 태어났고 몸집은 다소 작지만 짱구에 오목조목 생겨서 콩알 같이 예뻤다고, 역시 국어 선생님께 작명을 의뢰하였고 1번 언니와 끝 자를 돌림으로 2개의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그중 발음이 더 평이한 한 개를 골랐다고 했다. 또다시 2년이 지나 3번 언니가 태어났고 그때는 아빠 엄마 모두 은근히 아들을 기대하셨다. 엄마 배속의 움직임으로는 아들 같았는데 머리가 앞뒤짱구로 태어날 때 엄마가 고생을 좀 하셨으나 아빠는 아빠와 같은 용띠라서 좋아하셨다. 같은 분께 작명을 요청하니 2번 언니 때 주셨던 다른 하나를 다시 주시면서 아주 좋은 이름이라고 하셨다고 해서 그 이름이 3번 언니 것이 되었다. 여기까지 딸 3명이 2년 간격으로 태어났으니 그쯤 되면 가족 구성원을 정리해야 했다. 부모님 세대는 자식들이 아주 많았지만, 이후 6.25 전쟁 전후 베이비붐이 일어났을 즈음에는 나라에서 산아 제한을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 시대 한국 문화가 그랬듯이 아빠 엄마도 하나쯤은 아들을 원하셨고 그 욕구는 아빠보다 엄마가 더 강하셨던 것 같았다.
그 이후로 4년후 나를 임신하셨고, 두 분은 출산 자체에 대한 고민이 약간 있으셨나 보다. 당시 엄마와 같은 학교에서 재직하셨던 친했던 다른 여선생님도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셨단다. 그분은 이미 2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번엔 반드시 딸을 원하셨단다. 엄마는 반대로 이미 3명의 딸 이후 이번엔 아들을 원하셨고. 어쨌든 두 분이 다 아이를 낳고 보니, 그 집은 또 아들, 우리 집은 또 딸이 태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산모는 모종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둘을 바꿀까?..' 얼마만큼의 진심과 농담이 담겨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후에 내가 자라서 그때의 엄마 친구분들 모임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몇몇 분들이 웃으면서 다시 농담을 던지셨다. "애가 그때 바꾸려던 그 딸이라고..."
아무튼 내가 태어난 후, 엄마의 내적 갈등? 속에서, (지금 내가 말하기는 민망 하지만) 아빠가 나를 보고 '미스 코리아' 감이라고 바꿀 수가 없다고 하셨고 그렇게 나는 원래대로 우리 집안의 막내딸로 남게 되었다. 내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국어 학자 선생님은 퇴직 후 연락이 닿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차피 우리 4 자매 이름의 끝 자는 돌림자이니 중간 이름만 정하면 되었는데 당시 TV 인기 드라마 속의 주인공 이름을 떠올리며 글자 하나를 넣어, 우리 가족 만장일치로 내 이름이 정해졌다고 했다. 좀 어이없었지만 나는 내 이름에 만족한다.
그리고 나의 탄생이후 아빠는 스스로 병원에 가서 산아 제한을 위한 수술을 하셨다고 한다. 아빠 말로는, 엄마는 이제 손 만 잡아도 임신이 될 것 같았다고 하셨단다.
그렇게 무럭무럭 자란 내 아기 때 사진을 보면 정말 통통하기 그지없다. 피부가 하얗고 우유 살로 통통하여 웃으면 눈이 보이지 않도록 웃었다. 미스 코리아 이전에 당시에 있었던 우량아 선발 대회에 내보낼까 고민하셨다고 했다.
그때 이후 다 커서, 아니 이미 이십 대 후반이 되었을 때에는 거실을 지나다닐 때 엄마는 나를 한번 보시고는 "아, 재 참 옛날에 예뻤는데.." 하시며 말꼬리를 흐리셨다. 나는 그때마다 반박하듯, "왜, 내가 지금 뭐가 어때서?" 했다.
활달한 엄마는 소위 아줌마 모임이 지속되셨는데 그중에 하나는 선생님 시절 모임이었다. 나는 나만의 비밀, 첫사랑 때문에 우리 4 자매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재수를 하고 대학에 갔다. 어느 날, 엄마가 그 선생님 모임 후 집으로 돌아오셔서 말씀하셨다. 이십여 년 전에 나를 안 바꾸길 잘했다며, 그 바꾸려던 아이는 아직 삼수 중이라고.. 공부는 잘하는데 고집이 있나 보라고 하셨다. 이후 삼수 끝에 드디어 대학을 갔고 또 몇 년이 흘렀다. 다시 모임 후 엄마가 또다시 그때 안 바꾸길 정말 잘했다고 하셨다. 이번엔 그 아들이 주식을 하다가 크게 손해를 입혔나 보았다. 아니, 대체 언제까지 그 아들과 나는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일까. 우리 둘이 어렸을 때 이후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둘 다 잘한 것도 없었다. 둘 다 싱글인 상태로 너무 오래 남아있었다. 어느덧 연로해지신 두 분은 서로 손을 맞잡고 "우리가 왜 그때 저 늦둥이들을 낳아서 지금도 이 걱정일까.." 하셨던 때도 있었나 보다.
좀 억울한 면도 있었다. 아, 좋은 시기엔 말이 없다가, 걱정이 되면 문젯거리였다.. 그렇다 해도, 어쨌든 나는 우리 가족의 막내딸, 그것은 불변인 사실이다.
얼마 전에 나의 1번 언니의 외동딸이 결혼을 했다. 내 5명 조카 중 첫 번째로 태어난 1번 조카, 우리 집안의 개혼이었다.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우리 4 자매가 꿈꾸고 그렸던 그림과는 달리 우리 부모님은 그 1번 손주 결혼식장에 안 계셨다. 난 조카의 결혼식이 가까워질수록 내 부모님 생각이 더해지고 그리움이 더 커져갔다. 1번 언니는 딸의 결혼식이 가까워질수록 긴장했고 우리 3명의 동생들에게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우리 집안에서 첫 번째로 태어난 조카는 우리 3명의 이모들에게 축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3명 모두 진심의 마음이 담긴 축사를 하였고 결혼식은 행복하게 끝났다. 코로나 19 위기 속의 결혼식이라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안전하고 무사히 진행되었다.
결혼식 후, 1번 언니는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현했고 이렇게 자매들이 든든할 수가 없단다. 나는 장난으로 "3명이면 충분해? 모자라?" 했고 언니는 "딱 좋아, 7 공주라도 되면.. 그 축사 언제 다 끝나?" 하며 받아쳐서 우리 모두 웃었다.
그렇게 우리 4명의 자매들은 서로를 보듬어주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언니 동생이면서 동시에 다 친구들이 되어버렸다. 우리 4명이 함께 여행을 다닐 때면 왠지 아빠가 하늘에서 흐뭇하게 웃으시며 내려다보실 것 같다.
* Note : 형제자매는 부모님이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이다. 너무나도 다행이고 감사히 여기는 것은 우리 4명은 모두 친하고 사이가 돈독하다.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항상 마음이 일치한다. 이런 관계이다 보니 집안에 큰일이 생기면 4명도 모자란 것 같다. 아빠 엄마가 똑같은 정성의 마음으로 우리 4명을 낳고 키우셨듯이 우리는 다행히 서로를 매우 좋아하고 챙긴다.
그리고 더욱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언니들의 남편들, 즉 나의 3명의 형부님들도 모두 착하시고 사이가 좋으시다. 그래서 우리 가족 모임은 항상 화기애애하고 행복하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세월들을 가족 모두 건강히 서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을 하면서 잘 지내는 것이다.
그렇게 또 딸로 태어난 나는 아빠 엄마가 만들어주신 가족 속에서 잘 나이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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