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 친해지기 :: Aunt Karen's Note (카렌 이모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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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물과 친해지기
    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1. 3. 10. 18:40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시작된 직장 생활을 단 한 번도 쉼 없이 25년 간 지속했다. 어느 순간 심신이 지쳐 이제 한 번은 쉼표를 찍을 때가 온 것을 직감했다. 나로부터 있는 것 없는 것을 모두 끌어내 쓰기만 하고 보충이 없었던 삶, 더 이상 끌어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제는 좀 쉬면서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삭막해진 정신을 보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맞물려 나는 처음으로 가족으로부터 철저히 독립적인 세대원으로 혼자 살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자유로운 시간들이 주어졌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소소한 일들을 하나 씩 시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 동물과 함께 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반려 동물과 함께 한다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생명체에게 강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감은 무한 지속적이어야 한다. 

     

    나는 5명의 내 조카들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든 직접적인 나의 책임하에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언니들 형부들의 자녀들이고 나는 그저 옆에서 그냥 맹목적으로 예뻐하기만 하면 된다.

     

    누군가 이성에게 호기심이 가고 좋아하고 사귀게 되는 순간이 얼마나 가슴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인지 알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많은 행복감을 주는지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이 항상 긍정적이고 행복한 것만은 아님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영원 지속적이지 않았다. 불꽃처럼 피어나다가 어느 순간 식으면서 싫증이 났다. 나 자신보다 상대방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순간도 잠시 있었고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기도 했으나 초반의 타오르는 감정은 쉽게 사그라들기도 했다. 결국 나는 나 자신을 더 위하고 귀하게 여겼다. 어쩌면 나는 철저히 개인주의자라서 아직도 싱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한다는 것은 가족의 일원으로 책임감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인데 나는 아직도 자신이 없다.

     

    영국에 살고 있는 2번 언니네 가족의 막내는 반려견이었다. 이름이 찰리였는데 14여 년 간 언니네 가족의 일원으로 살다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언니와 언니 가족들의 상실감이 너무 커서 걱정이 되었다. 영국의 넓은 정원이 있는 주택에서 살고 있는 언니는 사과와 배 나무도 있고 워낙 꽃나무들도 다양하게 많았다. 찰리를 잃은 후, 언니는 식물에 애정을 더 쏟기 시작했다. 정원에도 이미 많이 있었는데 화분을 계속 들였다. 내가 사진과 동영상으로 구경을 한 후, 이제 그만 들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몸에서 고장 신호를 알려왔다. 한 군데씩 치료를 하며 잘 달래고 있다. 갱년기에 돌입하고 신체의 이상 신호가 마음과 정신을 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치열하게 달려오던 직장 생활을 중단하니 한 순간 찾아오는 허전함도 있었다. 무엇인가로부터의 위로가 필요했다. 

     

    2020년도 1월에 숙제처럼 묵혀오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술을 했다. 수술 후 마지막 외래진료까지 완료한 후, 코로나 19 팬데믹이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수술 후, 몸 회복을 위해 쉬어야 하는 시기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절제된 생활을 권고받았다.

     

    2020년 4월의 봄은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자주 다니던 백화점에서 바질 씨앗을 나누어 주었다. 별 다른 생각 없이 설명서대로 심었다. 며칠 후, 작은 씨앗에서 조그마한 떡잎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경이로운 모습에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큰 기대 없이 무심코 심은 씨앗에서 바질 새싹 잎이 나온 것에 감동이 생기고 매일 아침 거실 창가에 있는 바질 화분을 관찰하는 것으로 아침을 열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그 새싹 자체가 기특하기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두렵기도 했다. 반려 동물이 아니라 반려 식물이 계획도 없이 급작스럽게 생긴 것이었다. 

     

    다행히 바질은 잘 자라주었고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랐다. 흔히 말하는 자연친화적 상태의 흙과 함께 제공해준 상태였다. 바질 키우는 법을 검색했다. 충분한 햇빛이 중요한 요소 중에 한 가지였다. 나의 집은 다행히 남향이어서 햇살이 잘 들어왔으나 아파트 창가에서의 일조량은 바질의 절대 필요량으로는 부족한 듯했다. 물 조절과 적당한 환기로 바람도 쬐어 주었다. 동네 화원의 바질만큼 튼튼하고 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기에서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듯 그렇게 성장해 가면서 나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평소에 식물 키우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같은 꽃도 항상 내 손에서는 수명이 짧았다. 나의 1번 언니는 식물 키우기에 금손이었다. 나에게 들어오는 꽃들이 상대적으로 불쌍했다.

     

    그러던 내가 바질을 키우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러면서 작년 2020년은 바이러스의 집요한 확산으로 소극적인 삶의 방식이 이어졌다. 꼭 필요한 경우만 외출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 따로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봄의 꽃놀이도 해보고 싶고 그리워졌다. 완전 청개구리 심보 같았다. 점점 식물들이 내 눈에 다르게 들어왔다.

     

    어리고 젊었을 때는 푸른 하늘, 흰구름, 청량한 날씨의 가을이 제일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삭막했던 나뭇가지에서 연두로 시작하여 초록빛으로 새 생명이 부여되고 움트는 봄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바이러스 때문인지 그냥 나이 때문인지 모든 초록에 더욱 눈길이 가고 좋아지기 시작했다. 바질 이후, 동네 꽃집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재작년에 화분 하나를 선물 받았는데 근근이 견뎌주고 있었다. 이제 화분을 한 두 개 더 늘리고 싶었다. 무조건 초록잎에 관심이 갔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나는 소극적으로 문의했다. 아파트의 일조량에도 약해지지 않고, 비교적 생명력이 강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야 내가 자신감을 갖고 더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적절한 화분을 들여왔다. 집 안에 그나마 초록잎들이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생명력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 같아서 내겐 위안이 되었다.

     

    나도 이제 생명력 있는 무엇인가에 관심을 주며 살고 있다. 내가 관심을 주는 것 이상으로 나 또한 위로받고 있다. 그렇게 서투른 우리는 서로에게 친해지고 있는 중이다.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설렘과 떨림으로 관찰 중이다. 

     

    * Note : 모든 것은 처음으로 시작된다. 시작이 없으면 처음도 없다. 시작은 낯설고 두렵고 떨린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고 처음을 넘기면 더 이상 처음은 아니다. 

     

    나 아닌 또 다른 생명체를 맞이 한다는 것은 관심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저절로 관심이 기울고 있다. 그 처음을 시작했다. 기대해 본다. 나와 함께 할 그들과의 삶을. 그렇게 우리는 서로 친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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