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유럽 개인 기업인을 첫 대면하다. :: Aunt Karen's Note (카렌 이모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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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에서 유럽 개인 기업인을 첫 대면하다.
    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1. 6. 15. 18:55

    25여 년 간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Global Company)에서 일하는 동안, 2013년 12월 초부터 2014년 6월 초까지 약 6개월 동안 베트남(Vietnam)의 경제 도시인 호찌민(Ho Chi Minh) 지사에서 해외 업무를 보게 되었다.

     

    베트남은 예전에 60년 넘게 프랑스 식민지였던 역사가 있다. 그 영향인지 유독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미주 지역보다도 유럽 사람들의 왕래도 많고 실제 거주하는 유럽 사람들도 많았다. 식민지 역사의 영향으로 인하여 역시나 프랑스 사람들도 많고 의외로 러시아인들도 많았다. 수도인 하노이(Hanoi) 지역도 그렇지만 경제 도시인 호찌민에서의 외국인들은 그냥 베트남인들과 어울려서 사는 일반인의 모습이었다. 물론 잠시 스쳐가는 여행객들은 구분이 되었지만, 실제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서 나 또한 빠른 속도로 그저 스며들듯이 자연스럽게 살 수 있었다. 외국인들을 대하는 그들은 너무나 익숙했고 낯설지 않았다.  

     

    외국인들이 살기에 편리한 호찌민 도심 지역에 거주하면서 바로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지사 사무실이 있었다. 베트남에서의 특별한 업무 중에 하나는 베트남의 새로운 기업을 찾아서 우리 회사가 원하는 비즈니스와의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베트남 자체의 기업이든 베트남에서 자리를 잡은 해외 기업, 해외 투자가 이루어진 기업이든 상관은 없었다. 단지 우리 회사가 목표로 하는 부분과 그곳 기업의 목표로 하는 부분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했고 서로의 이익과 지향하는 바를 각기 달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스러운 일이었다.

     

    수많은 일정들 속에서도 새로운 기업 발굴을 위한 탐사는 중간중간 계속 이어졌다. 베트남 지사의 현지 직원들은 베트남 내의 여러 기업들을 찾아내고 그 기업이 생산하는 아이템(Items) 별로 구분을 했다. 미국에 본사를 둔 우리 회사에 이익이 될 수 있는 아이템을 우선적으로 선별했다.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수출할 할 경우의 모든 무역 관련 업무와 더불어 우리 회사가 필요로 하는 조건이 워낙 민감하고 까다로운 부분들이 많아서 기본적인 요건들을 충족할 수 있는지 사전 조사를 해나갔다. 일단 서류 조사 등을 통하여 직접 방문하여 만나보고 싶은 후보군들이 추려졌다. 사전 방문의 목적을 미리 전화와 이메일 등으로 설명한 후, 약속을 하고 직접 탐방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처음 미팅(Meeting)을 하게 되는 기업을 방문하기 전에는 우리도 당연히 준비가 되어야 했다. 나의 주된 업무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전문적인 업무는 다른 부서 리더와의 협업이 필요했다. 각 분야별 인원이 소수 정예로 그룹을 이루고, 미팅에서 의논할 부분도 정리가 된 후, 약속된 시간에 업체를 방문했다.

     

    베트남은 자체 공급되는 원자재를 바탕으로 가구 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목재로 만들어지는 커다란 가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장식 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흔히 발견되는 목재를 이용한 디자인과 가구들 또한 베트남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품목들이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기업은 프랑스인이 대표인 가구업체였다. 기업이라고 등록은 되어있지만 막상 방문한 곳은 도심 외곽 지역의 골목에 위치한 뒷마당이 넓은 단층 주택 건물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젊고 키가 훌쩍 큰 유럽 남자가 우리 일행을 맞이 하였다. 

     

    알고 보니 프랑스 식민지 시기에 건너온 세대의 후손인 것 같았다. 사실 업체의 오너(Owner)인 실세 대표는 그의 어머니로 우리가 자리를 잡은 회의 공간 뒤편에서 열심히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나이가 든 어머니는 오히려 창작 활동에 전념했고, 그의 아들이 사업 전면에 나서 비즈니스를 이끌고 있었다. 

     

    우리의 미팅이 이루어지는 공간과 그의 어머니의 창작실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우리의 미팅 내용이 들일 법도 했지만 그녀는 절대 귀 기울이는 기미 없이 작업에 열중했다. 흰머리가 많은 나이였지만 멋진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프랑스 본국에서 교육을 받은 탓일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들은 영어도 베트남어도 비슷한 수준인데 둘 다 아주 능숙하지는 않아서 우리는 기본적인 대화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야만 했다.

     

    뒷마당 같은 넓은 공간에 그들의 아이템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한 편에서는 소수의 베트남 작업자들이 생산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아이템은 주로 소가구의 형태였다. 작은 탁자, 협탁, 서랍장, 거울, 장식용 가구 등이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직접 창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아들이 컴퓨터를 이용한 디자인을 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이후, 상업용으로 판매 결정이 되면 샘플(Sample) 제작을 하고 바이어들과의 상담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물론 바이어들의 취향에 맞춰 주문 생산을 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디자인이 우선순위에 있었다. 그 당시 그들의 웹 사이트를 이용하기도 하고, 작은 전시장을 이용하여 비즈니스를 이어갔다.

     

    주문한 물량을 약속한 시간에 반드시 납품해야 하고, 대량 생산일 확률이 높고, 우리 회사 자체와 미국 내 기준이 되는 품질과 안전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작업을 하는 작업자들의 기본 노동법이 모두 부합이 되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수많은 까다로운 기준들을 맞출 수 있을지 투명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 문제점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원하는 수량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을 경우, 그들이 어디서 누구에게 생산을 맡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단 우리의 요청에 의하여 만남의 시간을 갖기는 했지만 그들에겐 우리의 제안이 그다지 절실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일단 미국 기업이라는 것도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의 인식에는 미국의 대기업은 물량을 앞세워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적인 부분은 안중에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인상적인 만남의 시간을 갖은 후, 우리 일행은 정중히 인사한 후, 후퇴했다. 우리들만의 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우리 회사와의 거래를 원하지 않는 기분을 맛보았다. 내 코가 납작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우리 회사에 입사한 이후, 우리의 제안이 달갑지 않은 듯한 인상은 거의 처음으로 받았다. 한국에서 일할 때, 한국의 거의 모든 기업은 우리 회사를 반겼고 그러는 동안 나는 우리 회사와 함께 다소 기고만장해져 갔던 것이었다. 가끔 한국 서울 지사 동료들과 연락을 했다. 나는 내가 겪었던 경험을 나누었다. 우리는 한국 기업들에게 그동안 망쳐져 가고 있었다고. 베트남 현지의 상황을 전달했다. 우리도 모르게 빠져있던 매너리즘(Mannerism)에 경종을 울려 주었다.

     

    그렇게 베트남 지사에서 일하면서 내가 우리나라, 한국 서울 지사에서는 겪지 못했던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아이템, 처음 만나는 베트남 기업과 베트남내의 다른 나라 기업, 베트남의 문화와 그 안의 다른 나라 문화.. 그 안에서 내가 그동안 익숙하게 처리했던 과정과 속도를 떠나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었다.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의 알림 이기도 했다.

     

    * Note : 세계에는 수많은 국가, 지역에 따른 문화가 다양하게 많이 존재하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나라 안에서만, 우리끼리만 쳐다보고 있는 동안은 시야가 그곳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워낙 미주 지역과 유럽 지역의 문화는 다르고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자존심과 거리감도 느껴져 왔었다. 요즘 세계정세를 보아도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고 싶은 미국과 중국, 또 다른 세력인 유럽 연합 등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윤여정 배우님이 수상 소감 시 언급했던 Snobbish(고상한 척하는)한 영국, 못지않게 콧대 높은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식 영어 조차 격조 높게 보지 않고 잘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베트남 또한 긴 역사 동안, 외세에 의한 침략과 전쟁 등으로 인하여 더욱 자존심 강한 국민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한국 사람인 내가 베트남이란 새로운 환경에 가서 미국 회사를 위해 프랑스 기업을 만났던 경험은 실로 신선한 경험과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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