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전환, 끊임없는 배움의 길. :: Aunt Karen's Note (카렌 이모의 노트)

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생각의 전환, 끊임없는 배움의 길.
    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2. 8. 3. 16:12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경험들이 있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배우고 교훈으로 남는 것들이 있었다. 나이와 꼭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조금 더 오래 살아온 사람이 더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할 확률이 크기 때문에 어느 사회 조직이나 관계 속에서도 연장자의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넓게 펼쳐져 있었다.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포함한 다양한 매체들을 통하여 궁금한 것들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검색을 하고 소통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한 편, 세상은 세계적인 바이러스 팬데믹(Virus Pandemic)과 같은 불안정한 상황과 그에 대처하는 환경에 따른 필요성, 그리고 그것에 의한 현상 중에 하나로 점차 개인적인 형태의 삶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회 곳곳에서 인생을 좀 더 오래 살아온 사람이나 윗사람의 일부를 향하여 '꼰대'라는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사회의 변화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예전 방식을 고집하거나 주장하고 심지어 요구하는 사람들을 주로 지칭했다. 요즘 세대를 가르는 방식에 완벽하게 동의하지는 않지만, 흔히 MZ 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은 예전 방식을 고수하거나 강조하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가만히 관찰해 보면 양쪽 모두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사실 나 자신조차도 젊은 세대를 대면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약간 긴장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방심하고 마음대로 표현하는 중에 꼰대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비단 그들이 싫어할까 봐 두려워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이라고 항상 옳은 것을 아닐 것이고 무조건 그들의 입장만 존중하는 것도 형평성에 맞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꼰대라고 불리기까지의 이유를 판단하고 개선할 것은 개선하고 입장을 표명하며 요구할 것은 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판단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신문 사설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다시 생각해 보기>에 관한 짧은 글이었다. 살면서 알고 배우고 깨닫게 되었던 모든 것들이 변함없이 옳고 언제나 그른 것이 아닐 수 있으니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암을 예방하기 위하여 채식을 주장하고 실천하던 채식주의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것도 일방적인 사고방식과 고집에 의한 피해였다. 요즘 세상의 정보에 의하면 채식주의가 항암 효과를 보장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글쓴이는 그러면서 자신이 언제나 좋다고 믿었던 요가 자세가 자신의 약점인 허리 디스크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나이 들면서 외부의 다른 것들에 대한 변화는 인정하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생각과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부모님 세대를 보면서 나이 들수록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고집만 강해진다고 투정하곤 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젊은 세대가 우리를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글쓴이는 이제 아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하길 권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뿐만 아니라 세월에 따라 스스로의 심신 상태도 변해가고 있으니 알았던 것,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변화에 적응하고 또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옳고 맞았던 것이 이제는 틀리고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뭔가 내 머릿속 사고방식을 향해 경종을 울리는 것 같았다.

     

    잠시 실생활에서의 내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조카들 중에 한 명은 먼저 직장 생활을 해왔던 나에게 사회생활에 대한 약간의 질문과 조언을 가끔 구하곤 했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을 전달하곤 했었다. 어느 순간 나는 그것이 정말 조카에게 도움이 될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해가고 내가 겪었던 시기와 상황이 조카의 현재 상황과 많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졌다. 나 자신과 내가 경험했던 것들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졌다기보다,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상황과 인식의 변화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슬기로운 조카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들으며 스스로 현명하게 판단해 나가고 있을 것이었다. 이제 조카는 조카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그냥 나 하나만 잘 살아가기 위함이면서 동시에 타인과 사회에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구구단을 외우거나 단순한 기술은 이미 예전에 터득한 것을 기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구단을 외우는 것으로 시작하고 평가하는 한국식 교육 방식이 얼마나 위험하고 수학의 기본인 창의력을 저하시키는 것인지를 토로한 이 시대의 교육자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제 예전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함을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맞춰 다른 방식을 받아들여야 함을 일깨워주는 또 다른 사례였다. 그러니 구구단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강요하는 꼰대 같은 짓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새로운 학습 방식을 궁금해하면서 뇌를 자극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율 주행 방식이 실생활에 활발히 도입될 세상에는 전통적 운전면허 방식의 습득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걸어왔던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 스스로를 지켜나가고 결국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 시작이다. 

     

    * Note : 지혜로움이라는 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지난날들의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지난 세월의 기간과 깊이의 정도는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깨달은 것은 삶의 길이와 비례해서 자연스럽게 누구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지혜롭기는커녕 마냥 어수룩한 상태로 마감할 수도 있겠다. 인간은 그렇게 끝까지 불완전한 존재인 것 같다. 어차피 완벽할 수는 없으니 이제라도 뇌를 좀 말랑하게 할 필요가 있다. 쓸데없이 고집 피우지 말고, 모든 사실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것, 다시 한번 생각하기가 필요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