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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첫출장, 첫인상 - 1편 자카르타와 인근 지역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0. 9. 2. 23:01
2000년대에 들어서서 회사 내에서 팀장 그리고 이어 부서장급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우리 한국 업체들의 생산 기지가 있는 국가들을 방문할 기회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나의 경우 담당하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중남미 지역을 먼저 다녀온 이후, 동남아시아 지역도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2000년대 중/후반경 동남아시아 몇몇 국가들을 차례로 가게 되었다.
그 첫 일정의 첫 방문 국가는 인도네시아였고 나 혼자 가게 되었다. 참고로 인도네시아를 아직도 간혹 인도와 헛갈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잠시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헛갈리는 대상 국가인 인도의 수도는 뉴델리이고,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종종 "인니"라고 줄여서 불러서 "인도"와 헛갈릴 우려가 있는 인도네시아는 (이후 아래에서는 나도 "인니"라고 칭하겠다)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 인구가 많은 국가로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인구수로는 세계 4위이고 수도는 "자카르타"이다. 2차 세계대전 전에 네델란드령 동인도 제도라고 불려서 더욱 인도와 헛갈리는 것 같다. 섬이 매우 많고 나라가 넓고도 가로로 긴 형태여서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지역마다 특색이 다양하다.
나는 일단 수도인 자카르타로 도착하였으나 일정 내내 자동차로 몇 시간씩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며 빡빡한 일정들을 소화해야만 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길게 늘어진 행렬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도착 비자를 받는 곳이었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장기 체류를 하게 되어 한국에서부터 인니 대사관을 통하여 미리 사전에 비자를 받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면, 단기 출장이나 여행 목적으로는 도착 비자를 받아야 했다. 오랜 기다림 속에 겨우 비자를 받고 입국장을 빠져나오니, 뜻밖에도 낯익은 반가운 얼굴이 나를 반겨 주셨다. 그분은 한국에서 내가 신입 사원일 때부터 만나 일하게 되었던 거래 업체 소속이었는데, 오랜 시간 업무를 이어갔고, 이후 그곳 인니 지사의 지사장님으로 파견 근무를 하고 계셨다. 마침 도착 후 첫 방문 업체가 그분이 근무하는 업체였는데 내가 처음으로 인니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 또한 반가움에 공항까지 손수 마중을 나오신 것이었다. 매우 감사한 일이었고 덕분에 업체의 생산 현장인 공장으로 가는 길에 그간의 안부와 함께 공사다망했던 지난날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분이 인니로 파견된 후 얼마 안 되어 인니에 커다란 태풍으로 인한 홍수가 났고, 그 자연재해의 규모가 워낙 컸고, 여러 한국 업체의 피해가 커서, 한국의 모든 TV 뉴스에서도 보도가 되었다. 그 당시 기자가 한국 업체의 생산지를 방문하고 현장 취재를 하면서 인터뷰를 하였는데, 바로 그분이 생생하게 현장 실정을 알려 주신 것을 나는 한국 TV에서 보고 상황이 안타까우면서도 내가 잘 아는 분이 TV 인터뷰를 하여 반갑기도 하였다. 그분과 나는 성(아주 흔한 성은 아님)이 같고 워낙 오랜 세월 알고 업무를 하다 보니 사석에서는 나를 장난으로 "누이"라고 부르고 나는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지역인 "까벤"이라는 지역의 공단에 여러 한국, 다른 나라 업체들의 생산 공장들이 몰려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오후 시간에 우리 회사 지사 생산 책임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 회사에서 인도네시아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매니저급 직원이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후, 함께 공장을 둘러보았고 그는 그 공장의 장/단점을 자기가 그동안 일하며 느낀 그대로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 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단의 형태로 이루어져 안정적인 인력과 시설 투자를 바탕으로 발전된 곳이었다. 지금까지 처럼 관리를 잘하면 별문제 없이 안정적인 반면, 수도 인근 지역이라서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앞으로의 임금 인상도 걱정되는 수준이라는 점, 그리고 한정된 지역으로 더 이상 증축할 수 없는 제한이 걸려있는 단점이 있기도 했다. 그나마 숙련된 인력에 의한 높은 생산성으로 높은 임금을 상쇄하고는 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인상적인 인니에서의 첫 공장 방문을 마감한 후, 우리 회사 책임자와는 다음 날 아침 만나기로 하고 나는 숙소 호텔이 있는 자카르카 시내로 향했다. 업체 지사장님이 우리 회사 책임자와 헤어지며, 나를 가리키며 사실은 내가 여동생이라고 하고 우리의 성(Last Name)을 상기시키자 그는 놀라서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는데 이내 우리가 농담이라고 하자 금방 껄껄 웃으며 떠났다. 업체 지사장님은 다행히 가족 모두가 인니로 이주하여 함께 자카르타에 거주하고 계셔서 나와 함께 퇴근하여 자카르타로 향했고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하였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작은 선물을 드렸다. 타지에서 고생하시니 건강 챙기시라는 의미에서 홍삼을 준비해 갔는데 인니에서는 한국 홍삼이 최고의 선물로 통한다면서 매우 감동하시고 고마워하셨다. 차 안에서 내다보는 석양이 아주 아름다웠는데, 지사장님께서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여 다행이지만 여전히 고국이 그립다고 하셨고, 퇴근할 때마다 석양을 보면 더욱 한국이 생각난다고 했다. 아들과 딸이 있는데, 사춘기인 딸은 12월이 되면 한국의 눈과 겨울,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그리워하며 그 더운 인니에서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고 자기 방에서 털모자를 쓰고 온갖 한국 문화에 빠져들곤 한다고 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왠지 마음이 찡했다.
날씨가 매섭게 추운 한국의 겨울에 인니를 방문하였는데 높은 온도와 습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한 여름보다 덥고 습했다. 하지만 주로 차로 이동을 하고, 건물의 실내는 에어컨으로 시원하다 못해 추울 정도였다. 단지 생산 기지인 공장들은 작은 사무실을 제외하고는 자연 바람이나 선풍기 수준 정도의 기계 바람에 의존하였는데 낮에는 오히려 더운 바람으로 느껴져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렇게 더운 날씨이지만 한국의 겨울인 그 시기는 인니도 역시 겨울인 시기였다.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라고 했다. 그리고 해 지는 시각, 일몰도 비교적 빨랐다. 인니는 날씨가 워낙 더워서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일찍 마감했다. 생산 현장은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아침 7~8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4~5시가 되면 마감하는 분위기였다. 출/퇴근 시간이 되면 수많은 오토바이 행렬이 이어진다. 도시 시내로 향하면 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여 도로가 꽉 찬다. 그야말로 교통 대란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비로소 자카르타 시내에 접어들었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지는 수도의 면모에 놀랐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화려한 도시의 모습이었다. 수도인 자카르타는 높은 빌딩 숲이 이어졌고, 인구 밀도도 높아 사람들도 차도 많았다. 쇼핑센터들이 즐비하고 더운 날씨로 인한 열대 나무들이 많은 도로에는 차와 오토바이 물결로 그야말로 교통체증이 말도 못 했다. 대중교통, 그중에서도 지하철이나 도시 철도 같은 것이 없고, 저마다 자가용과 오토바이를 교통 수준으로 삼으니 도로는 곳곳이 막혔다. 나는 1990년대 중반에 절친과 함께 동남아시아 몇 개국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정에 인도네시아의 유명하지 않은 섬 중에 한 곳을 하루 방문한 경험 외에는 인니는 그 출장이 처음이었다. 그 섬은 그야말로 향토색이 짙은 곳이라 수도인 자카르타와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기억되었다.
자카르타의 도시 규모에 놀라고, 교통 체증에 놀라 잠시 멍한 사이에 내가 앉은 차 창 밖에서 누군가 검은 얼굴을 드리대며 창문을 똑똑하고 두들겨서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 당시까지도 차가 정차되어 있으면 지방에서 올라온 남루한 차림의 거리의 사람들이 그렇게 구걸하듯 차 안을 기웃거린다고 했다. 다행히 에어컨으로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항상 그런 이유로 모든 문을 닫아걸어 잠그고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빈부의 격차를 느꼈다. 더운 나라이고 열대 과일이 열리니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굳이 지방에서 올라와서 저런 구걸을 하며 산다고 했다. 게다가 그런 이유들로 특별한 아르바이트까지 있다고 했다. 교통 문제가 심각하니 출/퇴근 시간에는 자가용에는 3인 이상이 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범칙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지사장님은 운전사와 2명인데 어느 날 중요한 손님과의 급한 약속이 있어서 할 수 없이 그런 도시의 걸인 아르바이트 1명을 운전석 옆에 태웠는데, 이내 후회하였다고 했다. 너무 악취가 심해서 며칠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고 했다. 심한 교통 문제에 그런 편법까지 생기니 아이러니했다. 비가 많은 계절에 비가 갑자기 장대비처럼 쏟아지면 도로는 그야말로 마비가 되고 꼼짝없이 그곳에서 멈추어 버린다고 했다. 도시는 배수 시설이 좋지 않아서 비가 쏟아지면 금방 넘쳐흐르니 물과 교통과의 전쟁인 도시인 것이었다. 그래서 인니에서는 항상 어느 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 가라는 팁을 주셨다. 아니면 곳곳에서 곤란한 처지의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자카르타 시내에서 저녁 식사 약속을 하면 90% 넘게 약속 시간에 지각을 한다고 했다.
인니의 수도임에도 자카르타에서 잊힐만하면 가끔씩 테러의 뉴스가 보도되곤 한다. 가끔 종교적인 이유로 또는 이해관계의 집단들이 폭탄 테러 같은 사건사고를 일으키니 도시 안전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외국인이 많은 지역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해야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르기 쉬우니 도시 중심이 오히려 타깃(Target)이 되곤 했다. 그런 이유로 호텔로 들어설 때도 사람과 차량 검문을 철저히 했고, 가까운 거리도 차로 이동을 하다 보니 더욱 교통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레스토랑 입구에서도 우리 가방, 심지어 작은 핸드백까지 검사했다. 도착한 레스토랑은 퓨전 인니 음식점이라고 했다. 권해 주신 음식 모두가 인니의 풍부한 해산물과 지역 특산물, 인니 특유의 소스로 요리되어 맛을 냈고 나는 정신없이 맛을 음미했다. 워낙 강한 향신료들이 많이 들어가는데 그곳은 외국인들을 위한 퓨전 요리로 맛이 다소 순화된 것 같았다. 한국을 떠난 타지에서의 삶과 가족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국의 이런저런 소식들을 전하며, 예전의 추억들도 되새기며 그렇게 자카르타에서의 첫 하루를 보냈다.
* Note : 직접 가 보지 않는 곳에 대한 예측과 막연한 상상은 막상 그곳을 가게 되어 보고 느끼는 순간, 비슷할 경우도 있지만 완전히 다를 경우도 있다. 나에게는 인도네시아가 후자의 경우인 나라 중에 하나였다. 생각보다 발전되고 빌딩 숲의 장관이 펼쳐진 수도, 그래서 도시의 야경이 볼 만한 도시, 자카르타의 첫인상으로 자본주의 나라임을 확인하였다.
이어 겉모습은 평화로워 보이고 바쁘고 역동적인 도시이지만, 한 때는 세계인의 주목을 끌기 위한 테러 집단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는 도시이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잘 알 수 없는 두 얼굴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 이유로 좀 더 알아가고 싶은 나라 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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