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꿈과 재능을 찾아 헤매고 있다. :: Aunt Karen's Note (카렌 이모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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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아직도 꿈과 재능을 찾아 헤매고 있다.
    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0. 8. 29. 23:54

    한국에서의 교육 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주입식 교육, 헬리콥터 맘, 점수에 따른 학교와 전공 선택, 사교육에 의한 선행 교육 등.. 대부분 부정적인 말들이 많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에서의 자녀 교육은 어느 정도 체계적인 울타리 안에서 이뤄지는 것 같지만, 창의력을 키우는 것과 다양성을 인정하기에는 쉽지 않다. 실제로 내 주위의 자녀들을 가진 부모들의 거의 모든 딜레마는 자녀들이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목표를 향해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자녀들에게 어떤 꿈이 있고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물어본 후, 그 뜻을 존중하고 든든한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만의 하나, 자녀가 스스로의 꿈을 확고히 갖고 있고 그에 해당하는 소질도 있고 그에 상응하는 노력까지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의견이 잘 맞는다면 그것만큼 행운인 일도 없을 것이다.

     

    꿈, 장래 희망에도 시대와 사회별로 유행(Trend)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린 시절에는 선생님, 의사, 변호사, 과학자 등에 간혹 대통령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부모님들의 자녀에 대한 기대와 바람이기도 했다. 요즘은 내가 알기로는 유투버, 연예인, 운동선수 등이 대세를 이루는 것 같다. 하지만 트렌드에 휘둘려 스스로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냥 막연한 꿈을 꾸고 있다면 의미 없는 일이다. 꿈이라는 것은 어느 시기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고,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설렘이 있어야 한다. 마치 연애의 감정을 느끼듯이 시작을 하고 사랑에 빠지고, 누가 뭐래도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마음, 그래서 누가 말려도 스스로의 모든 열정을 담아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것은 또한 단지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계속 이어지고 또 변하면서 죽기 직전까지 꿈꿀 수 있고 희망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실제 상황은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있지는 않다. 한글을 깨치는 순간부터 영어 그리고 또 다른 제2 외국어를 공부하고, 수많은 학원들을 전전하며 선행 학습을 하는 등 주입식 교육에 휘둘린다. 물론 능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것저것을 배우면서 또 다른 경쟁에 내몰리기도 한다. 대부분은 바쁘게 돌아가는 학사 일정에 따라 어느덧 초/중/고등학교를 지나 어느 날 갑자기 대학 입시 문 앞에 서있게 되고, 당장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기를 강요받는다. 그리고는 성적에 따라 부합하는 대학, 전공도 정해진다. 참으로 허탈한 일이다.

     

    언젠가 신문 기사를 통하여 유명한 농구 선수 출신인 허재 감독의 아내가 인터뷰한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 부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들은 작년에 농구 선수로서의 최고의 한 해를 보냈고 능력을 인정받는 수상도 했다. 남편이 농구를 하면서 수많은 고생을 한 것을 평생 보고 살았던 허재의 아내는 아들들은 농구,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살기 원치 않았고 두 아들들이 어린 시절에도 농구를 시키지 않았다. 남편이 부상을 당하고 은퇴를 한 후, 지도자 수업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가족 모두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두 아들들은 자연스럽게 학교와 과외 활동을 즐겼다. 그러면서 그들은 과외 활동으로 접한 농구에서 소질과 흥미를 발견하고 몰두했다. 남들보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그들의 바람은 간절했다. 유전자로 인한 소질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원하고 진지했다는 부분이 주목할 만하다. 그 이후론 부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희생으로 두 아들들은 그들 자신의 꿈도 이루고 행복한 성공 가도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스스로가 느끼고 발견하고 시작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보통의 경우는 창의적인 발상이나 자기 주도적 학습으로 자신의 꿈과 재능을 찾기란 쉽지는 않다. 반 백 살이 넘은 나 또한 아직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에게 소질이 있는 재능을 발견하거나 그에 해당하는 직업을 찾지 못했다. 좋아하는 일을 신나게 하고, 너무 좋아 온 정열을 쏟았더니 그에 합당하는 경제력까지 따라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발굴, 고민과 생각 중이다.

     

    나는 내 세대에 지극히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대학교와 전공도 점수에 맞는 무난한 선택을 하였고 졸업도 취업도 적당한 선에서 이뤄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학 졸업 후 처음 들어간 글로벌 기업(Global Company)에서 25여 년을 지냈다는 사실 자체가 어느 정도 나와 잘 맞았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나는 당시 왜 그리 그것을 인정하기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계획에 맞춰 움직이고, 디테일에 강하고, 필요하면 때로는 내가 주도권을 갖거나 리드를 해야 하는 성향이었고, 나의 가치와 생각들이 회사가 원하는 방향과 목표와도 어느 정도 부합하였다. 하지만 나는 창의적이거나 정치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처음 회사에 입사한 후,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자 회사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회사의 변화는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으니 회사의 변화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뭔가가 익숙해질 무렵이면 항상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또 다른 배움과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글로벌 기업 안에서 본사의 여러 바이어들과 수많은 아이템(Item)들을 다루게 되는데 각 부서별로 맡은 업무와 성격들이 달랐다. 어느 부서는 소수의 아이템을 대량 생산, 관리하는 부서로서 상대하는 바이어도 한계가 있지만 또 어떤 부서는 다양한 아이템들을 소량으로 생산, 관리하고 그만큼 상대하는 바이어들도 많았다. 나는 입사 후 많은 기간 동안 후자의 부서에서 업무를 이어갔다. 많은 아이템을 접해보고, 많은 바이어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만큼 수시로 담당하는 업무에 변화가 찾아왔다. 조금 적응될만하면 또 다른 변화가 왔다. 신입 사원이었을 때는 원래 사회가 이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고, 그 이후는 잦은 변동과 변화에 화가 나기도 했다. 변화가 있을 때마다 그냥 받아들이니 나에게는 늘 그래도 되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쉽게 생각하나 하고 불만과 짜증이 생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상사나 선배에게 서운함을 표출하면, 그저 다 좋게 이야기하시니 내가 회사를 떠날 것이 아니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변동과 변화에 또다시 적응을 해야만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어느덧 우리 한국 지사에서 다루는 아이템 대부분을 진행해 보았고, 본사의 여러 바이어들과도 업무를 함께 하게 되었다. 정신이 없고 바쁘긴 했지만 여러 아이템을 하다 보니 새로운 아이템이 신기하기도 하고 각기 다른 바이어들과 조율하는 방법도 배웠다. 어느 한 가지를 진득하게 하면 그 나름대로 배우는 면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를 알게 되면 그 다양함 속에서 배워 나가는 면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그 변화들을 체험한 것들이 다 내 삶 속에서 피가 되고 살과 뼈가 되고 있었다. 이후 내가 팀원들을 리드하는 부서장이 되었을 때, 나는 각종 아이템을 거의 다 경험해 봐서 모든 아이템의 기본을 알고 이해하는 리더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투자를 할 때에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라는 말이 있듯이 유사한 효과를 냈다. 트렌드가 바뀜에 따라 또는 회사 정책이 바뀌면서 떠오르는 아이템도 있고 하향되는 아이템도 있으니 그때마다 담당하는 직원들의 업무 성과 결과도 달라졌다. 무슨 아이템이든 경험한 바 있고, 기본을 알고 있는 나는 이후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덜 했고, 회사 입장에서도 조직이나 구조에 변화를 줄 때 나 같은 경험자는 운신의 폭이 많아 부담이 없었다. 예전에 선배님들이 다 좋게 이야기하실 때는 귀에 안 들렸던 것들이 그야말로 나중에야 이해가 되었다.

    회사의 리더 그룹에 속한 사람으로서 면접관 역할을 하게 되었을 때도, 다들 비슷한 경쟁자들이 몰릴 경우 다양한, 혹은 색다른 경험이 있는 인물에게 더 관심이 가곤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아무리 주입식 교육의 틀 안에 있었지만, 자기 선택과 권한이 절대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중/고등 과정을 지나면서 문과 혹은 이과를 선택했다. 대학과 전공을 선택했다. 단지 대부분 오로지 대학 합격만을 목표로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대학 입학을 위한 선택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고 마음만 먹으면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선택의 차이였다.

     

    요즘 대학들은 입학할 때부터 전공을 결정하기 이전에 일단 인문 계열, 공과 대학, 경영 대학 등의 식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니 그나마 조금은 선택의 시간이 주어진다. 의과 대학처럼 기본 교육 후 전공과목이 결정되듯이 말이다.

    좀 더 나아가 일률적인 순서대로의 교육 과정과 직업의 선택이 아니고, 다른 선진 국가들의 예처럼, 공부를 하다가 사회로 나가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해보고, 또다시 스스로 필요에 의하여 학업과 학위를 공부하거나 때로는 전공을 바꾸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는 시기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그런 변화에도 학부모와 자녀들이 당황하지 않을 시스템과 체계,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기대해 본다.

     

    다행히도 우리 세대보다 내 조카들 세대를 보니 한 집의 자녀수도 줄고 관심이 집중되면서 좀 더 많은 재능 교육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수영, 스키, 보드 같은 스포츠나 피아노, 기타, 바이올린 같은 악기 하나쯤은 취미로 가질 수 있도록, 언어영역도 다양하게 경험해 보는 등. 결국 내 조카들은 그런 것들을 취미 생활로만 즐기고 전공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요즘은 그 범위가 확대되고 즐길거리는 무궁무진하고 그것들을 통한 사회 활동들을 만들어 나가니 참으로 다행이고 기특한 일이다.

     

    나도 모르게 25여 년을 몸 담아 일했던 첫 직장을 회고하니, 여러 아이템들을 접하여 배우고 여러 바이어들을 상대하고 여러 나라들로 출장을 가고 또 해외 근무를 해보았던 경험들이 나의 안목과 커리어를 만들어 주었으니 감사한 일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나의 세대 사람들보다 넓은 시야와 오픈된 안목을 가질 수 있었고, 그것들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 Note : 나는 나 자신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고집이 세고 내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다. 다소 독선적이고 강해 보일 수 있으니 그건 나의 단점이다. 하지만 내 일은 내가 결정해야 나중에 그 결과도 남 탓을 하지 않고 내 탓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변화에 노출되면서, 인정 아니면 수긍, 체념도 빨랐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하고 절망하다가 이내, '이 또한 지나가겠지'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누구보다 빨리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이제 어느 순간 "절대로"라는 단어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살다 보니 내가 절대로 안 하고 싶거나 못할 것 같은 일을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하게 되거나 해야 할 일이 결국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절대로"라는 단어는 왠지 부정적이다. 벽을 치는 느낌, 막힌 느낌이다. '절대로 안 할 거야, 절대로 아닐 거야, 절대 그럴 일 없어 등'과 연결되는.

     

    심한 황사 속에서도 마스크가 답답하여 안 끼던 내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나갈 때마다 마스크를 챙겨서 정확히 끼고, 식물 기르기에 똥 손이던 내가 매일 아침 꽃들에게 신선한 물을 갈아주고 초록색 새싹이 움트는 바질 화분에 설레는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고 있다. 철저히 도시 여자로 살기를 주장했던 내가 집을 소개해 주는 TV 프로그램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핀 내 집의 형태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제는 "절대로"라는 단어를 피하고, "현재는.. 이래요"라고 말하기로 했다. 앞으로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반 백 살이 넘어도 내가 진짜 하고 싶고 내게 재능이 있는 일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렇게 이번 생은 마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고 하니 조금이라도 젊고 어렸을 때, 더 많은 다양함에 맞서 보리라. 익숙함에 안주하지 말고 변화라는 도전을 외면하지 말고 가능성에 항상 문을 열어두길. 그 모든 경험이 좀 더 트인 시야와 생각 그리고 스스로의 꿈과 가치를 찾고 성장시킬 수 있도록.  아직도 나는 꿈을 꾸고 키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호감 가는 사람들에게 애정 어린 질문을 해본다. "꿈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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