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두라스에서 이생과 이별할 뻔했다. :: Aunt Karen's Note (카렌 이모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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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두라스에서 이생과 이별할 뻔했다.
    삶의 소소한 멘토링 2020. 7. 22. 23:35

    내가 25년간 몸 담았던 비즈니스의 세계를 우리는 '트라이앵글 비즈니스 (Triangle Business)'라고 불렀다. 글로벌 기업인 회사의 본사는 미국에 있었다. 그리고 각 나라에 지사가 있었는데 그중에 나는 한국 서울 오피스에서 일했다. 우리는 본사와의 업무를 위해 한국 업체들을 상대했다. 한국 업체의 생산기지인 공장들은 주로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활발한 나라들에 있었다. 그야말로 다국적으로 연결고리가 되어있었는데, 간략히 보면 본사인 미국, 지사와 그 해당 업체들이 있는 나라, 그리고 그 해당 업체들의 생산기지가 있는 나라, 이렇게 3개 동선을 가리켜 트라이앵글, 삼각 구조로 본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한창 제조업에 힘을 쏟던 1970~80년대에만 해도 한국 업체의 공장들이 주로 한국에 있었지만, 이후 바로 한국 업체들은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하며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노동인구가 풍부한 나라들로 생산기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 초기에 일반 사람들은 살면서 어쩌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할 나라들이 있는 중남미 지역이 물망에 오르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 시기에 그 머나먼 나라들로 가서 땅을 파고 공장을 지어 오늘날의 산업을 이루었으니 실로 대단한 한국 기업, 한국인들이다. 내가 일을 시작했던 1990년대, 그리고 한창 업무에 물이 올랐던 2000년대 중반까지도 중남미 국가들은 우리 업계에서는 중요한 생산지들이었다. 프로그램과 업무를 책임지고 독립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위치에 오르자, 한국 업체들의 생산국에 출장을 갈 기회가 주어졌다. 2000년대 중반에 나는 옆 부서의 후배 한 명과 같이 그렇게 중남미 출장길에 올랐다. 미국 LA 공항을 경유하여 온두라스(Honduras), 과테말라(Guatemala)와 니카라과(Nicaragua) 3개 나라의 일정을 세웠고 그 첫 도착지는 온두라스였다.

     

    우리 2명은 먼저 미국 LA 행 비행 편을 탔다. 보통 중남미 출장을 간다고 하면 해당 한국업체 담당 직원들이 함께 동행을 하는데 일정상 그들은 중남미에 먼저 가서 업무를 보고 있으면서 우리의 도착을 기다렸다. 직원들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본사의 출장 지침에 따라 비행기와 현지 호텔이 예약되어 있었다. 우리는 처음 중남미로의 출장이 설레기도 했지만 워낙 치안이 불안정한 나라들이라서 긴장감을 갖고 온두라스 공항에 도착하였다. 일요일 저녁 시각에 도착하였고, 우리의 가방들을 기다리며 낯선 나라의 공항이 참으로 썰렁하고도 스산하게 느껴졌다. 중남미에 이어 미국 본사까지 방문하게 되는 긴 일정이라서 각자 2개의 여행 가방들을 기다렸는데 후배 가방들을 찾은 후, 끝내 내 가방 2개는 보이지 않았고 찾을 수 없었다. LA 공항까지 도착한 것은 확인을 했었다. 난감함에 휩싸여 분실물 센터로 가서 일단 신고를 했다. 밤이 깊어가는 시간이어서 어쩔 수 없이 신고 후 입국장을 빠져나왔는데 이어서 두 번째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전하고 평판 좋은 호텔의 리무진 예약을 해 놓았는데 우리가 가방을 찾고 분실물 센터에 신고하면서 시간이 길어지자 우리가 도착을 못한 줄 알고 리무진은 그냥 떠나 버린 것이었다. 밤이 깊어가니 공항은 이내 인적이 드물고 더 스산해졌다. 그 당시의 온두라스 공항은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 지방 국내선 공항 보다도 사람이 없었고 시설도 훨씬 낙후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내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였다. 우리에겐 모바일 폰이 있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 나라까지 해외 로밍 서비스가 잘 되지 않았다. 공항 내 공중전화를 찾았으나 현지 동전이 준비되지 않아 사용 불가였는데 설상가상으로 밤이 깊어 모든 환전 데스크도 마감했었다. 우리 둘은 정말 해답을 찾지 못하고 난감해했는데 나는 후배보다 의연해 보여야 할 것 같아서 말은 없어지고 생각은 방황하고 있었다.

     

    여러 방법들을 머릿속으로 굴렸지만 답이 없었고, 공항의 분위기는 점점 더 썰렁해졌는데, 공항 밖을 내다보니 불빛도 별로 없고 불빛이 제대로 없으니 그 나라 현지 사람들의 모습이 더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인종이나 나라별로 차별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두운 장소에서 낯선 나라 사람들 모습이 너무나도 어둡게 생각되었다. 그 시각에 공항에서 계속 머무를 수는 없어서 공항 문쪽으로 다가가니 몇몇 현지인들이 다가와 뭐라고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는데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워낙 치안이 안 좋다, 특히 온두라스는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급속도로 두려워졌다. 그중에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택시가 눈에 띄었는데 그 택시 기사는 우리에게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건네주었다. 우리는 예약한 호텔 이름을 말하니 곧장 데리고 가겠다고 타라고 했다. 후배와 나는 약간 망설이며 눈빛을 주고받았으나 딱히 다른 방법도 못 찾아서 그냥 택시에 후배 짐들을 싣고 올라탔다.

     

    택시는 이내 공항을 빠져나와 어두운 왕복 2차선 도로를 계속 달렸다. 나와 후배는 두려움과 긴장감에 침만 꼴깍 삼기며 서로 말도 못 하고 밖만 응시했다. 가도 가도 불빛이 점점 더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운전기사가 우리를 납치하여 알지도 못하는 외지로 데려가면 어쩌나... 지금 이 순간은 우리가 2명이지만, 도착한 그곳에 가면 일당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우리를 해치면 어쩌나.. 하는 온갖 불안한 상상을 떨쳐 버리기 힘들었다. 운전기사 인상을 확인하기 위해 차 안의 백미러를 이따금씩 보다가 운전기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가 먼저 말을 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손끝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잠시 후면 호텔들이 모여 있는 시내에 도착한다고 했다.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긴장의 눈으로 앞을 보자 잠시 후 다시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 후, 시내 도로로 들어가는 듯했고, 그렇게 더 달리고 난 후, 우리가 예약한 호텔 이름이 보이는 건물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에 도착하여 후배 짐을 내려주며 다시 마주한 운전기사의 인상은 내 기분 탓인지 선해 보였다. 우리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며 팁을 후하게 건네니 그도 정말 고마워하며 떠났다.

     

    예약된 각자의 방을 확인하고 후배와 나는 곧장 열려있는 호텔 내의 레스토랑을 찾았다. 저녁을 한참 넘긴 때였고, 호텔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려 허기짐을 느꼈다. 30분 후면 마감이라는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따스한 수프와 약간의 먹을거리를 주문하여 요기를 했다. 늦은 식사를 하며 후배와 나눈 대화 속에서 우리는 같은 느낌,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차마 택시 안에서는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나누는 한국말도 운전기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둘 다 입을 꼭 다물고 창밖만 내다봤지만, 사전에 들은 납치, 도둑, 강도 같은 조심해야 하는 단어들만 떠올랐다. 후배는 그 출장 이후 몇 달 안에 결혼을 하는 계획이 있었다. 자기는 결혼도 못하고 이 머나먼 나라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다는 말에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꽤 좋은 글로벌 호텔 체인이었는데도 그 나라의 호텔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시설이 낙후되었고, 방 안도 왠지 썰렁했다. 어찌 보냈는지 모를 밤을 보내고 과연 내 가방들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다음 걱정을 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다음 날 아침 호텔 로비에서 약속된 시각에 한국 업체 직원들을 만났다. 한국으로부터 먼저 출발한 업체 직원들과 반갑게 조우하였고, 이어 온두라스 현지에서 근무하시는 직원들도 만나서 서로 인사를 하였다.

    그들이 준비해 온 차량으로 이동하였는데 날이 밝은 아침 시간에 사방을 둘러보니 주위가 삼엄하도록 감시하는 눈동자들이 많았다. 차는 주로 SUV 큰 차량들이었는데 겉에서 봐도 뭔가 튼튼해 보였다. 호텔에도 그리고 시내의 건물들에도 총을 가진 경찰인지 뭔지 모를, 아무튼 경비 태세의 사람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우리가 탄 차 안에서 후배와 나는 한국 업체 직원들에게 지난밤, 우리가 격은 일들을 죄다 풀어놓았다. 마치 부모를 되찾은 어린이들처럼 떠들어댔다. 듣자마자 한국 직원들 모두 "뭐라고요? 공항에서 택시를 탔다고요?" 큰 소리로 외치며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모두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아직 살아서 그들 앞에 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잠시 바라다보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쳤던 상황을 다 이야기했고, 우리에게는 영어를 할 줄 아는 그 택시 기사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안전한 유명 호텔 리무진 예약이 되어있다는 말에 안이하게 생각했다면서, 변수를 생각지 못했다면서, 그냥 공항으로 마중 나갔어야 했다면서, 되려 미안해했다. 우리는 다소 어안이 벙벙하여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들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아닌 게 아니라며 자책했다.

     

    알고 보니 온두라스는 정말 치안이 위험한 나라였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그 당시 여러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제일 위험한 나라였고 당시 급속도로 더욱 좋지 않아서 매일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고 했다. 갱들도 많고 총기 관리도 안 되고 누가 경찰이고 누가 갱인지 구분도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우리처럼 딱 봐도 외지에서 온 어리바리해 보이는 사람들은 바로 범죄의 표적이 된다고 했다. 다른 중남미 나라들은 그나마 도둑질과 강도들을 당하거나 만나도 상해를 입고 끝이라면 온두라스는 죽고 끝난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들 듣자 우리가 정말 엄청나게 간 큰 행동을 했고, 그만큼 경각심과 사전 준비 없이 생각보다도 훨씬 위험한 나라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다시 주위를 살펴보니 모든 것이 다시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동하는 차량들은 거의 방탄 차급의 중무장을 하였고, 총을 가진 경비가 항상 동승했다. 우리가 도착하는 생산기지, 모든 공장들은 모두 군대급의 경비병들이 지키고 울타리들도 탄탄해 보였다. 시내에 있는 레스토랑들도 쇠창살로 된 문이 있고 경비가 지키고 있었다. 무슨 나라를 구하는 일도 아닌데 이런 나라까지 와서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한국 업체들의 커뮤니티는 그들끼리 아주 가깝고도 소문이 빨랐다. 우리가 방문을 하는 곳마다, 우리에게 놀라운 얼굴로 반기면서 말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셨다면서요.." 하고 말끝을 흐렸다.

     

    이어 LA 공항으로부터 행방불명된 나의 2개 가방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은 모두 회의적이었다. 멀쩡히 내 가방들이 도착을 하더라도 온두라스 공항에서 공항 직원들에 의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마음을 비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저 우리가 살아있음을 다시 한번 다행으로 여겼다.

    그 당시에는 온두라스에도 우리 회사 지사가 있었고 현지 직원들이 3명 있었다. 그중 업무를 위해 나와 이메일 주고받던 직원 한 명이 예전에,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 항공사 직원이었다면서 예전 동료들을 통해 내 가방을 추적해 주었다.

    날씨가 아주 춥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머물렀던 3일 내내 이슬비처럼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계속 그런 스산한 날씨 때문인지 그 나라에 대한 인상이 더 나아지질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 출발할 때의 옷차림으로 며칠 업무를 봐야 했다.

     

    업무로 들어가서는, 정말 한국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끊이질 않았다. 일정 내내 한국 업체분들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에 신경을 썼지만 우리는 출장 본연의 임무에 정신을 집중했다. 생산기지, 공장들에 도착하여 연혁을 보면 내가 어린 시절부터 이미 그 머나먼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업체도 있었다. 초반기에는 치안이 그래도 좋았겠지.. 생각하며 어찌 지구 반대편의 이 나라까지 알고 찾아와 생산 기반을 처음부터 일구고 현지인들을 고용하여 교육시키고 산업을 발전시켰을까 정말 대단한 의지의 한국인들이었다. 다행히 모든 일정을 안전하게 마무리하였다.

     

    그 사이에 지사의 현지 직원은 내 가방들 추적에 성공하였고, LA에서 제때 온두라스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었다고 했다. 이후 과테말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공항에 도착하자 분실물 센터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내 가방 2개를 발견한 나는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몇 년 전에 TV 프로그램 중에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분위기가 흡사 비슷했다. 무장 세력의 흔한 모습,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 인지도 모르는 상황, 정권과 결탁한 검은 세력 그리고 그 안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과 산업 현장들..  그 이후, 중남미에서의 비즈니스는 점차 좀 더 안전하고 성장 동력이 유리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특히나 위험한 온두라스에서의 한국 업체는 가장 빠르게 철수되었다. 직원들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우리 회사도 예전에는 상황이 그 정도인지 몰랐을 수도 있었겠다. 온두라스 지사와 직원들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회사의 안전도의 단계와 그에 대한 파악과 대응도 더 발전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후배와 나는 운이 아주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그 출장 여정을 생각해 보면, 하늘에 계신 아빠가 마치 나의 수호신처럼 출장 기간 내내 보호해 주셨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딱히 종교가 없는 나는 아빠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내가 위험한 곳에 출장을 가고, 위험천만한 비행을 하고, 가방까지 나를 따라오지 않았더라도 아빠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사랑하는 막내딸을 위해 다 계획에 맞게 보살펴 주신 것 같다. 온두라스에서 만난 택시 운전기사도 아빠가 보낸 수호천사임에 틀림없다. 그것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 Note : 어느 나라에 가던지 사전 준비는 필요하다. 물론 여행 목적에 맞게 출장이면 업무 준비, 그냥 쉬러 휴가를 간다면 그에 맞게 계획을 하게 된다. 나는 항상 나름대로 준비를 꼼꼼히 한다고 생각해 왔다. 어떤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더라도 안전이 확보된 계획,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한 비상 연락망은 확보를 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물론 요즘은 문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예전보다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나아졌다.

     

    어떤 나라의 어느 장소, 어느 순간에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준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 그것도 하나의 경우뿐만 아니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옵션까지도 생각해 두어야 한다.

     

    치안이 불안정한 곳은 피하고, 굳이 가야 하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현지 지인분들을 알아두고 그들의 도움을 사양하지 말고 받자. 예의를 지킨다고 또는 그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거부하지 말고 미안하지만 그냥 받아들이자. 그리고 충분히 감사하면 된다.

     

    1번으로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안전한 계획, 2번은 현지 경험 있는 분들을 연락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의 방법, 3번은 현지의 우리나라 대사관 정보 등등.. 나를 지키는 것이 제일 먼저이고 그것이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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